안개 낀 몽환적인 풍경 너머로 나무와 물이 아련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은 단연코 풍경화가 아니다. 14년 만에 개인전을 연 어느 게으른(?) 작가의 흥미로운 항변을 듣기 위해 그의 작업실로 향했다. 이기봉 작가의 신작, 그 모호한 안개 속에 감춰진 진실은?
2022.12.28

경기도 광주의 곤지암. 고즈넉함과 스산함이 공존하는 이곳은 종일 작업과 씨름하는 예술가의 작업실로는 더할 나위 없어 보인다. 안개 속 몽환적인 풍경을 담은 그의 화폭과도 묘하게 어울리는 공간이 아닌가. 회화와 설치를 넘나들며 작업 중인 이기봉. “연고는 없고, 30여 년 전, 지인이 내놓은 땅이었어요.” 최소한의 쉼을 청할 수 있는 소박한 주거 공간과 두 동으로 이루어진 창고형 작업실. 온종일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잠시 들러 목을 축이고 떠나는, 이 한적한 작업실에서 그는 매일 시간과의 싸움을 벌인다. 그 사투의 결과물인 신작 50여 점으로 구성된 전시 <Where You Stand>가 12월 31일까지 국제갤러리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열린다. 자그마치 14년 만에 열리는 그의 개인전 앞에 ‘왜?’라는 물음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관객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 주기적으로 전시를 여는 것이 작가의 피할 수 없는 본분이라면, 그는 본분을 잊은 게으른 작가이거나 고민 깊은 철학가임이 분명할 터다. 오랜 칩거 후 그가 내민 것은 안개 속 신비로운 물가 풍경. 한데 그는 이것은 풍경화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런데 왜 14년이나 걸린 겁니까?
“너 뭐 했느냐고 야단맞는 기분입니다(웃음). 게으름이겠죠. 문제의식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기도 했고요. 갤러리에서도 계속 두고 봤겠죠. 이기봉이 두더지같이 땅굴을 여러 개 파니까(웃음). 그런데 그것이 한 줄기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지금은 좀 보이나 봅니다. 그러니, 합시다! 이렇게 된 거죠.” 그렇다고 작업을 쉰 건 아니다. 몇 해 전부터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만둔 터였다. “학교에 있을 때도 작품은 꾸준히 했어요. 해야 된다, 해야 된다, 늘 주문을 걸었죠. 그렇게 조금씩 쌓이다 보니, 내 생각도 쌓이더라고요.” 이번 전시의 주제이자 모두를 향한 질문이기도 한 <Where You Stand>는 작가 이기봉이 본 세계를 소개하는 자리이다. “세계 속의 나. 네가 서 있는 곳이 세계야! 여기가 바로 세계라는 의미를 담아냈어요. 자기 존재의식의 강화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의문 하나가 생긴다. 그의 화폭 속에는 안개, 물, 나무가 주를 이루고 있으니. 세계와 이 풍경은 대체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습한 안개를 몰고 온 이기봉
“나는 습한 것을 좋아해요. 아침에 해가 쨍해서 드라이한 대기가 아니고 습기가 약간 있고 칠리(chilly)한 상태의 그것이 나한테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줘요. 습기가 없으면 눈이 건조하듯, 습기가 신체나 세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의 정신에도 습기가 필요합니다. 마른 정신에서는 사고가 불가능해요.” 그가 강조하는 것은 ‘젖은 정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마른 정신’보다는 알 듯 말 듯 모호하고 감각적인 습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 상태가 바로 인간의 내면(심연)에 가깝다 여긴다. “심연에 관심이 많아요. 내 작품 모두 그것과 연관돼 있어요. 심연이 만들어낸 깊이. 존재의 의미에 연결되어 있죠. 심연으로 들어가는 일은 무섭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아래로 막 떨어지는 느낌이랄까요? 인간에게는 누구나 그런 공포가 있어요.” 사실 그에게 물은 공포의 대상이다. “어릴 적 물에 빠진 적이 있는데, 검은 그림자가 다가와 쭉 끌어 올렸죠. 아마 어른의 다리였던 것 같아요. 나보다 더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해결 안 되는 딜레마에 빠진 사람, 헤매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심연이라는 이야기는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푸른 물을 담은 수조를 등장시키며 물의 형태를 드러낸 2003년의 개인전 <There is No Place - The Connective>도, 안개와 물과 같은 ‘습한’ 것들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풀어낸 2008년의 작업도, 형태는 다르지만 작품의 공통된 주제는 ‘심연’이었다. 그리고 2022년, 그는 더욱 짙은 안개를 이끌고 우리 앞에 선 것이다.

안개 속 ‘막’의 정체, 그리고 1cm의 공간
이기봉은 심연을 드러내는 장치로 안개를 끌어들인다. 작업 방식 역시 여느 회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간단히 설명하면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린 뒤 그 위에 얇은 ‘막’을 덧대고 다시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이때 캔버스와 막 사이에 1cm의 간격이 생기는데, 이 때문에 안개 낀 듯 입체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이 연출된다. “불투명한 막의 정체는 플렉시글라스라는 폴리에스테르 섬유인데, 그 두께감 때문에 느낌이 깊어지죠. 최근에는 폴리파이버라는 또 다른 재료로 변화를 주었습니다.” 플렉시글라스에 비해 폴리파이버의 무게는 10분의 1 정도로 가볍기 때문에 작업하기가 훨씬 수월하다고 그는 덧붙인다. 하지만 어떤 재료가 다른 재료보다 낫다는 개념은 아니다. 두 재료가 던지는 감각은 각기 상이하며, 원하는 느낌에 따라 적재적소에 사용될 예정이다.
“안개 작업에는 여러 가지 효과가 들어 있는데 시선을 옆으로 하면 점점 더 깊어지는 걸 볼 수 있을 거예요. 쭉쭉 옆으로 움직이면 표면에 그려진 것만 탁 떠오르고 나머진 사라져요. 내가 움직이면 안개가 끼는, 흥미로운 구조죠.” 관람자의 각도, 움직임에 따라 안개는 짙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는 마치 마술을 부리듯 안개 속 심연의 세계를 관객 앞에 펼쳐 보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막’이 아닙니다. 1cm의 공간, Empty, 빈 공간이 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많은 이들이 화면에 등장하는 나무, 물에 대해 묻지만 그것들은 이번 작업에서 액터일 뿐이에요. 오랫동안 의도적이지 않게 내 주변에 있었던, 혹은 내가 좋아한 아이들이 놓여 있는 거죠. 어떤 때는 나무가, 또 어떤 때는 물이 공연할 것이고, 다음은 꽃이 될 수도 있고….” 그가 강조했듯 우리가 주목할 것은 1cm의 공간으로 대변되는 무한한 심연의 세계로, 그곳에서는 끝없는 투쟁과 환영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몽환적인 환영 속에서 문득 허우적대는 우리의 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심연이 담긴 그의 그림은 그리하여 풍경화가 아니라 ‘세계화’인 것이다.



‘환영’을 담은 철학자와 공학자 사이
이번 신작에는 안개 속 풍경만 자리하는 것은 아니다. 이기봉의 ‘막’은 안개를 넘어 텍스트로 확장된다. 모호한 형체의 풍경 뒤에 중첩된 알 수 없는 텍스트.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차용한 텍스트로, 이 책은 오랫동안 나에게 미스터리였어요. 마치 세계처럼. 어려워서 안 읽히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해받길 원하는 책 같지도 않고요. 인간의 뇌는 태어나면서부터 언어적으로 시스템화되어 있어요. 그거로 세상을 보게끔 학습되었죠.” 그런데 과연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세계를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그는 고매한,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철학자의 텍스트를 차용해 이러한 언어의 한계와 본질을 화두로 끌어들인다. 그의 작업에 텍스트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2012년 책을 물이 든 수족관에 넣는 의미심장한 설치를 선보였는데, 스위치를 누르면 책이 나비처럼 춤을 춘다. 물에 담긴 그 책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것이었다. “수족관 안에서 책이 춤추듯 부유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의 진면목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책을 수족관에 넣음으로써 책은 죽었지만 그 이야기는 다른 곳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것들은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있죠.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언어와 비언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환영의 세계. 이기봉은 그 세계의 진실을 조금은 게으른 철학자의 자세로 묵묵히 펼쳐 보인다.
“세계성의 환영들을 엔지니어링하는 일. 그게 내 방향인 것 같아요. 작가에게는 작품이 내게 다가오는 힘, 그 강도가 중요한데, 어느 순간 소리가 크게 들렸다가 작아지는 시점이 있어요. 그때 다른 작업을 꿈꾸게 되는 것 같아요. 치약의 마지막을 짜내는 기분으로,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그 가능성을 실험해보는 거죠. 다 쓰고 죽자, 뭐 이런 기분으로.” 문득 그의 작업실 풍경이 다시금 떠올랐다. 총천연의 액체가 실을 타고 흐르고, 텍스트나 기호 등이 자동으로 새겨지도록 프로그래밍된 기계 시스템이 자리한 그의 작업실은 얼핏 공학자의 실험실을 떠올리게 했다. 환영의 세계를 통해 인간과 사물, 세계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해온 이기봉의 지난 시간. 그 고뇌의 흔적은 아직 잉태되지 않은 작업실의 그것들에 더욱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안개 속 풍경은 그저 서막에 불과할 뿐. 본질을 향해 내달리는 무모한 공학자와 조금은 느린 집념의 철학자 사이, 이기봉이 있었다.
EDITOR : 설미현PHOTO : 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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