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웅앓이’에 빠진 이들도, 잊힌 청춘의 기억 앞에 가슴 몽글해진 이들도, <그 해 우리는> 속 주인공 최웅(고오 작가)의 드로잉에 홀리듯 빠져들었다. 오직 수작업의 촘촘한 선으로 완성한 ‘건축물’과 영겁의 시간과 경이가 느껴지는 ‘나무’ 시리즈. 이 작품의 실제 작가는 누구일까? 현실판 고오, 일러스트레이터 티보 에렘(Thibaud Herem)이 프랑스에서 소식을 전해왔다.
2022.03.08
건축물의 파사드(정면)와 나무. 분명 너무도 평범한 소재다. 그런데 왜 그의 화면은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일까. 티보 에렘, 그는 종이 위에 그만의 건축물을 재건하듯 가장 가는 펜으로 촘촘히 선을 그어 작품을 완성한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 200~600시간. 디지털의 홍수 속에 수작업을 고수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오히려 낯선 감흥을 던진다. 그는 수천, 수만 개의 벽돌 하나하나를 그리며 건물의 역사, 건설 과정, 여기에 참여했을 사람들을 상상한다. 끝없는 상상과 긴긴 시간과의 사투 끝에 완성된 그의 건축물, 나무에는, 그것들에 얽힌 역사와 시간의 흔적이 축적돼 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초상화’라 칭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 특별한 초상을 위해 그는 영국, 프랑스, 일본, 한국 등에서 장기간 생활하며 기꺼이 느린 여행자를 자처한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런던 포시즌스, 삼성전자 협업 등 동서양을 사로잡은 그 드로잉의 힘을 들여다볼 차례다.

일러스트레이터 티보 에렘, 그는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촬영지를 특유의 섬세하고 서정적인 드로잉으로 풀어냈다.
SBS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이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럽게 극에 등장한 당신의 작품도 많은 관심을 받았어요. 이 드라마와는 어떻게 함께하게 되었나요? 한국에 대한 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서울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지 몇 년째고요. 실제로 한국에 머물면서 일상의 오브제, 거리, 전통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아마도 이런 내 작업을 보고 제작사 측에서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일러스트레이터로 등장하는 ‘고오 작가’ 캐릭터와 당신의 작품이 잘 맞아떨어졌어요. 혹시 드라마를 봤나요? 주인공과 어떤 점이 닮았나요? 드라마를 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주인공과 나는 기묘하게도 매우 닮았더라고요. 작업에 대한 태도, 잠을 못 자는 것, 로맨스…. 제작사 측에서 나의 작품과 매우 잘 맞는 캐릭터를 연결해줘서 기뻐요.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었어요. 당신의 작품은 동양적인 감성이 감지되고, 깊은 명상으로 이끄는 묘한 힘이 있거든요. 이것이 한국에서 당신의 작품이 인기 있는 이유일까요? 아마도 그 부분은 ‘한국과 사랑에 빠진 나’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뭔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정서와 내 작품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만약 한국 사람들이 나를 한국인 아티스트로 생각한다면 영광일 따름이죠.

한옥에도 관심이 많은 티보 에렘. 그가 작업한 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으로, 2019년 한국 개인전을 통해 선보였다.
드라마 속 작가는 29세, 사실 이른 나이에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립했어요. 당신의 20대 청춘, 그해 당신은 어떠했나요? 20대에는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인생을 발견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놀라운 장소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25세에 나만의 작업 스타일을 수립할 수 있었죠.
삼성전자 비스포크, 더콘란샵 서울, 윤보선 고택, 온지음 아름지기 작업 등 유독 한국과 인연이 깊은 것 같아요. 한국을 모티프로 작업도 많이 했는데, 한국의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만나고, 연결하고, 교류하고, 발견하려는 사람들의 갈증, 전통과 현대성,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은 흥미롭습니다. 한국에서 작업하며 얻은 고유의 경험과 놀라움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작품에 대한 자극을 주며, 도전하게 하고, 창조하도록 하지요.

티보 에렘을 대표하는 또 다른 시리즈 ‘나무’. 삶과 세월을 머금은 그의 나무는 고요하고 평온한 명상을 부른다.
‘토고 신사(Togo Jinja)’, ‘라 쇼브-수리(La Chauve-Souris)’ 등 일본에서도 오랫동안 머물며 작업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곳에서의 작업은 어땠나요? ‘라 쇼브-수리(La Chauve-Souris)’는 2016년 도쿄 르몽드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 선보인 작품으로 4개 세트 중 두 번째예요. 이 작품은 내가 처음으로 선보인 가상의 건축물 시리즈로, 가을의 빛과 함께 담아냈죠. 일본에서의 생활과 작업은 많은 실험을 하는 계기가 됐고, 유럽적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회가 됐어요. 그 결과 작업을 좀 더 개인적인 접근으로 바꾸게 되었고, 내 자신에게 진실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지요. 특히 첫 번째 나무 그림도 거기에서 그렸으니까요!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왜 친숙한 디지털 대신 손으로 그리는 작업 방식을 택했나요? 그래픽 디자인 전공이지만 디지털 시대 이전에 공부를 한 세대예요. 타이포그래피를 포함해 모든 것을 손으로 배웠어요. 오히려 내게는 수작업이 더 친숙한 셈이죠. 사실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나중에 나의 직업에 도움이 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됐죠. 내 책을 만드는 일도 그중 하나였고요.

(왼쪽) ‘르 레자르(Le Lezard)’, 여름. 이 그림은 그가 그린 첫 번째 허구의 건축물이라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 해 우리는>에서도 등장했다.
(오른쪽) ‘라 쇼브-수리(La Chauve-Souris)’, 가을. 2016년 도쿄 르몽드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 소개된 작품으로 4개의 드로잉 세트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 같아요. 다양한 도구를 두고 왜 굳이 펜을 택했나요? 정확하게는 0.1mm 펜인데, 단순히 현재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가는 펜촉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더 가는 펜촉(품질이 검증된)이 있다면 세밀한 표현을 위해 그것을 사용했을 겁니다.
세밀한 디테일이 요구되는 작업 방식상, 한 작품을 그리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고 들었어요. 가장 긴 시간이 걸린 작품은 무엇인가요? 채색 작품일 것 같지만, 사실 가장 오랜 시간이 소요된 건 흑백 드로잉 작품이에요. 영국의 그림책 전문 출판사인 ‘노브로 북스(Nobrow Books)’에서 출간한 책 <런던 데코(London Deco)>에 실린 ‘배터시 화력발전소(Battersea Power Station)’가 그 작품이죠. 손으로 하나하나 그린 8만 개의 벽돌로 구성되었는데, 그것을 완성하는 데 600시간이 걸렸어요.
0.1mm의 가는 펜으로 촘촘히 선을 그려 나가는 아날로그식 작업 방식은 당신만의 특기죠. 덧칠을 할 수도 없으니, 오차, 실수에 따른 긴장감이 상당할 듯합니다. 긴장감은 자유롭게 그리기 위해 존재하며, 그것은 작업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사실 첫 번째 드로잉은 너무 두려웠어요. 3개월을 그리다가 실수를 용납할 수 없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끝내기까지 8개월이 걸렸으니까요. 작품이 끝나자마자 내 자신에게 말했죠. 다음 작품은 다를 것이고, 스트레스 없이 즐길 거라고. 물론 그다음 작품은 10배 더 좋아졌어요. 그 이후로 스트레스 없이 그리고 있고, 실수도 작품의 일부로 생각하게 됐어요.

250년의 역사를 지닌 큐 왕립식물원에 자리한 큐 팰리스(Kew Palace). 조지 3세가 머물던 궁으로 티보 에렘은 이 건축물의 컬러와 위치를 특히 좋아했다.
많은 이들이 티보 에렘의 시그너처로 ‘건축물’ 시리즈를 꼽습니다. 그릴 건축물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나요? 나름의 기준이 있는데, 그리기 좋은 구조인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요. 깊이, 재료, 비율, 건축양식은 물론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예술적인 그 어떤 감정이 중요한 부분이에요.
최근에는 실재하는 건축물과 허구의 건축물을 결합하는, 확장된 작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기존 작업보다 어떤 걸 더 느끼게 될까요?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볼 때, 내가 그림을 그렸을 때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끼기를 바라요. 현존하는 건축물을 그린 작품은 리얼리티를 구현해 일상을 숭고하게 바라보게 하며, 추억을 불러일으키죠. 허구의 작품은 상상력과 서사를 좀 더 채워주고요. 나는 사람을 그리진 않지만, 나의 작품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믿어요. 대중이 현실 혹은 허구로부터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섬세한 선도 물론이지만, 당신의 작업에서 ‘그림자’의 의미도 남다른 것 같아요. 맞아요. 정확히는 내가 그림자를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빛을 표현한 것이고, 그림을 하나로 이어주는 중요한 도구입니다(덧붙여, 강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극대화한 그의 화면은 건축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며 파사드 이면의 숨은 서사를 드리운 듯 묘한 오라를 뿜어낸다. 건축물의 작품명 옆으로 여름, 가을 등 계절이 따라붙는데, 서로 다른 계절의 빛과 그림자를 그저 조용히 바라봐도 좋겠다).

런던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배터시 화력발전소를 그린 것으로,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600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런던에 거주하며 작업하다 고향인 프랑스 니오르(Niort)로 옮겼다고 들었어요. 작업 환경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인가요? 옮긴 작업실 풍경도 궁금해요. 삶의 환경을 위해 장소를 바꿨을 뿐, 나의 작업이 영국에서 프랑스로 바뀐 것은 아니에요. 작업실에는 L자 형태로 2개의 거대한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하나는 그림을 그리는 용도고, 다른 하나는 채색을 위한 테이블이에요. 벽에는 그림 아이디어와 멘토들의 작품, 여행에서 가져온 많은 장난감과 식물로 덮여 있어요. 그리고 정원을 볼 수 있는 큰 창문이 있고요.
런던에 살 때 손수 많은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고 들었어요. 프랑스에서도 런던에서처럼 나무를 가꾸고 있나요? 내 영국 정원을 트럭에 실어 프랑스로 가져왔어요. 프랑스에는 식물로 가득 채워진 더 많은 야외 정원이 있고요. 손수 씨 뿌리고 가꾸면서 수년 동안 키웠고, 가장 오래된 나무는 늘 큰 감동을 줍니다.
식물과 나무를 굉장히 좋아하는 게 느껴져요. 작업에도 ‘나무’가 등장하죠. 철학적으로, 상징적으로, 미적으로, 내가 믿는 모든 것들이 나무에 표현되어 있어요. 나무를 그리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느낌이랍니다. 사람들이 내 나무 그림을 보고 같은 것을 느꼈으면 합니다. 고목을 바라보는 것은 명상적이죠. 나 역시 내 그림을 볼 때 명상을 이끌도록 노력합니다.

1, 2, 4 0.1mm 펜으로 디테일의 극치를 보여주는 티보 에렘. © Thibaud Hérem 3 영국 프리미엄 편집숍 더콘란샵 서울에서도 그의 팝업 전시가 열렸다. © Thibaud Hérem
‘건축물’ 시리즈가 비율, 대칭, 정확성이 요구된다면, ‘나무’ 시리즈는 자유로울 듯합니다. 실제 작업할 때도 그 묘미가 다를 것 같아요. 나무의 초상, 건축의 초상. 작품은 모두 초상화입니다. 내 손은 다른 걸 그리지만, 내 마음은 다르지 않아요.
현재는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가요? 올해의 계획이 궁금해요. 메인 프로젝트는 6월에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입니다. 건축뿐만 아니라 많은 새로운 작업이 함께할 겁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매우 흥미로울 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 외에도 일 년 내내 새로운 모험을 꾀할 것이지만 더 이상은 말해줄 수 없어요. 계속 지켜봐주세요.
마지막으로, 어느 인터뷰에서 본 적이 있어요. 언젠가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꿈이라고요? 내가 디자인한 건물을 만들고 싶어요. 실제로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맞아요. 그것이 내 꿈입니다.
COOPERATION Thibaud Hérem(Www.thibaudhere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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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설미현PHOTO : <더네이버>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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