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역병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세균과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조선 시대. 선조들은 과연 돌림병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202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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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무장현 지도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과 채색  

세균에 대한 이해가 없던 당시 사람들은 미신에 기댔다. 두창을 마마신의 노여움을 산 결과로 해석하며 마마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왕은 전염병 사태를 자신의 덕이 부족한 탓으로 자책하고 여제(厲祭)를 주도했다. 여제란 억울하게 죽거나 제사를 지낼 자손이 없는 귀신인 여귀를 달래기 위한 제사다.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의 제를 올리는 여단(厲壇)을 따로 표기한 지도가 있다. 한양 도성 북쪽뿐만 아니라 지방관이 파견되는 각 고을에도 필수적으로 제단이 설치됐다.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을 회화로 표현한 무장현 지도에는 읍치 오른쪽에 여단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백성의 치료와 함께 국가가 나서서 종교적인 행사를 진행했음을 시사한다. 

역병의 재앙을 막아주는 부적 목판, 목재 삼재부적판(조선, 나무)  

 

역병의 기세와 극복 의지는 계속된다
어려움이 닥칠 때 과거의 기록은 소중한 자산이 돼준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일상생활이 힘들어지고 이동과 모임 또한 제한되는 등 낯선 전염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대규모 유행병은 처음이 아니었다. 현재까지 백신이 없어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피해와 비교할 수 없지만, 근래에 한국은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감염병인 사스(2002년), 신종플루(2009) 메르스(국내 2015년)를 겪은 바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한 전염병은 많았다. 콜레라, 뇌염, 결핵은 과거 인류를 고통스럽게 한 시대의 역병들이다. 1821년 국내에 처음 들어와 괴질로 불린 콜레라는 19세기 당시 사망률이 40~70%에 이르렀다. 모기로 감염되는 뇌염은 1960년대에는 한 해 동안 3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결핵은 1954년 하루 사망자가 300명이 넘었던 때도 있었다. 난생처음 겪는 듯한 상황이지만, 역병은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고 그때마다 위생 관리 개선과 백신 개발, 예방 접종 등으로 극복해왔다. 현재의 질병 관리와 방역 시스템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방역 경험의 축적을 토대로 마련된 결과로 이마저도 새 역병들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볼까? 기록의 시대였던 조선 시대는 역병 대응에 관한 흥미로운 흔적을 여럿 남겼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 시대의 역병을 주제로 다룬 소규모 전시 <조선 역병에 맞서다>를 기획했다. 바이러스나 세균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당시, 선조들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돌림병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싶다. 콜레라, 두창,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 기근이 빈번했던 시기에 계절마다 찾아오는 전염병은 사람들의 삶을 비참하게 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전염병의 공포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조명하는 사료를 기반으로 한 이 전시에서 두창을 앓은 양반의 초상화, 죽은 자를 기리는 글, 예방과 치료법을 적은 의학 서적과 의료 도구,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물 등을 볼 수 있었다. 전시가 말하려는 것은 결국 전염병은 늘 우리 곁에 있었고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 또한 역사와 함께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막연한 공포심에서 벗어나 앞으로 또 다른 형태로 찾아올 전염병에 대처하는 지혜와 긍정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기 위해 박물관은 대부분이 폐장 상태였다. 곧 국립 대구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7월 3일부터 한 달간 전시가 이어지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메시지가 닿지 못한 아쉬움을 지면으로 달래본다. 

 

 

 

등준시무과도상첩          
김상옥 초상화_조선 1774년, 비단에 색

두창은 조선 시대 사람들을 힘들게 한 대표적인 전염병 중 하나다. 급성 발열성 발진성 질환으로 대두창의 경우 치사율이 30%에 이르는 등 전염성과 사망률이 매우 높다. 대두창은 치사율이 30%에 이르고 한국을 넘어 전 세계 인구 사망 원인의 10%를 차지하기도 했다. 두창은 피부 발진이 생기고 곪았던 흔적을 남기는 탓에 피부 표면이 움푹 파이는 흉터를 남긴다. 영조 20년인 1744년 특별 무과 시험인 등준시 합격자 18인을 그린 화첩 <등준시무과도상첩>에서 유진하(1714~?), 전광훈(1722~?), 김상옥(1727~?) 3인의 초상화에 두창 흉터가 표현되어 있다. 경기도 박물관이 소장 중인 오명항 분무공신상(1728)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정조 시대 문신 조홍진(1743~1821)의 초상화에서도 이러한 마마 자국이 발견된다. 초상화를 남긴 이들은 양반이었고, 모두 두창을 앓다가 회복된 사람들이다. 

 

 

 

신찬벽온방
조선 1613년, 종이에 목활자 인쇄  

전염병 예방법과 치료법을 담은 서적들이 있다. 조선 왕실은 전염병이 대대적으로 도래할 때마다 벽온방을 펴냈다. 벽온방은 따뜻하게 물리친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의 의료서로, 중종은 전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지침과 치료법을 담은 책을 지시한다. 1525년 1월 내의원 김순몽 등이 작업해 간이벽온방을 만들었다. 광해군 1613년에는 허준(1539~1615)이 편찬한 신찬벽온방이 있었고, 효종 때인 1653년에도 벽온신방이 편찬되었다. 신찬벽온방은 1612년 가을 함경도에서 시작한 온역(瘟疫, 티푸스성 전염병)이 서울을 통해 대대적으로 퍼진 상황에 대응하는 의료 지침서다. 허준은 온역의 원인으로 운기의 변화, 위로받지 못한 영혼, 청결하지 못한 환경, 청렴하지 않은 정치 등을 꼽았다. 전염되지 않는 법을 살펴보면, 문을 열고 큰 솥에 물 2말을 채워 집 한가운데 두고 소합 향원 20환을 넣고 달여 한 그릇 마셔라, 창졸간에 약이 없는 경우 참기름을 코끝에 바르고 종이 심지로 콧구멍을 후벼 재채기를 하라, 웅황가루를 참기름에 개어 콧구멍 속에 바르라, 처음 병이 걸린 사람의 옷을 깨끗하게 세탁한 후 밥 시루에 넣어 쪄라 등이 있다. 

 

 

 

동의보감          
조선 1613년, 초간본을 후대에 중간, 종이에 목판 인쇄    

동의보감이 2015년 6월 국보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새롭다. 앞서 2009년 7월 31일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허준의 의학 서적은 현재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허준은 1596년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조선의 의학을 토대로 동의보감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정유재란으로 잠시 멈췄다가 1610년 광해군 2년에 이르러 완성했다. 3년 후 내의원에서 훈련도감자로 책을 찍어 널리 보급, 동의보감은 조선 후기에 대표적인 의학 서적으로 자리매김했다. 1799년에는 어의 강명길(1737~1801)이 동의보감을 토대로 변화한 의학 이론과 민간의 임상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제중신편을 완성한다. 이는 시대에 맞게 변화된 생활과 질병의 양상, 중국의 최신 이론과 민간 경험을 토대 삼아 민간 의료를 지원하고자 한 정조의 뜻이 담긴 의서였다.  

 

 

 

대신마누라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과 채색  

허준이 동의보감을 완성하기 두 해 전 1608년에 두창의 치료서인 ‘언해두창집’을 냈지만 세상에서 천연두가 종식된 것은 1979년이었다. 그의 치료 방법인 우두종법이 1796년에 발견된 지 181년 만의 일이다. 이토록 무서운 전염병인 두창은 사람들에게 두창신, 마마신, 호구마마 등의 이름의 신으로 불렸다. 두창을 함부로 부르면 노여움을 살까봐 높여 부른 것이다. 대신마누라는 무당이 죽어서 된 신이나 무당 자신의 돌아가신 스승을 신으로 모신 것으로 여성 신격을 뜻한다. 아흔아홉 상쇠방울과 삼불제석이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는 풍채 있는 여성으로 표현되는데, 여러 제신을 배송하고 각각의 굿을 순조롭게 진행하도록 돕는 신이 대신마누라다. 역병이 돌면 대신마누라의 역할과 활약이 커졌다. 

 

 

 

호구거리 무녀내력     
20세기 전반, 종이에 색     

두창신을 두려워하고 중하게 여긴 사람들은 두창신이 꺼리는 것을 삼갔다. 금기한 것은 다음과 같다. 제사, 초상집 출입, 연회, 방사, 외인 출입과 함께 기름, 꿀, 누리고 비린 냄새, 더러운 냄새 같은 것이다. 병을 가져온 신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살살 달래서 집을 떠나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두창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두창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후 관리까지 했다. 사람들은 병을 앓고 난 후 13일째 되는 날에 마마배송 굿을 치렀다. 두창을 몰고 오는 호구가 탈을 부리지 못하도록 치른 굿, 즉 호구거리다. 전통 시대 무속에 관한 사료가 많지 않은 가운데, 무녀내력은 채색화와 설명으로 굿거리 절차를 기록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자휼전칙    
조선 1783년, 종이에 활자 인쇄     

역병이 돌고 사람들이 죽으면 고통받는 아이들이 생긴다. 정조는 흉년과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긴급 아동 구호 대책을 세웠다. 자휼전칙을 제정한 것은 같은 해 2월부터 전국으로 확산된 역병과도 관련이 있는 조치였다. 조정과 지방 수령들이 책임지고 버려진 아이들을 기르게 했다. 정조가 나서서 이웃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게 한 것. 한양 5부에서 4~10세 결식 아동들을 진휼청에 보고하면, 진휼청 밖에 흙집을 지어 살게 하거나, 세 살 이하의 버려진 영아들에게 젖을 먹일 수 있는 유모를 찾아주고, 의료, 음식과 의복 제공 등의 지원이 이뤄졌다. 왕의 인정(仁政)이 백성이 스스로 베푸는 인정을 낳았다.

 

 

 

종두침, 두장판, 휴대용 상자
대한제국, 나무, 유리, 금속        

고종 22년인 1885년에 지석영은 우두법에 관한 의서인 우두신설을 썼다. 지석영은 조카가 두창으로 목숨을 잃어 종두법 보급이 시급함을 느낀 터였다. 1796년 영국의 의사 제너가 소를 이용한 우두법을 발견했다. 두창은 한 번 앓으면 다시 전염되지 않는다. 소의 두창인 우두가 신수공통병임을 발견한 제너는 우두에 걸린 암소의 우두 고름 딱지를 떼어다가 사람에게 주사해 병을 고의로 옮긴다. 현재의 백신과 같은 처방이다. 지석영은 국내 서양식 의원인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웠다. 이 나무 상자는 대한제국 시대에 사용된 천연두의 접종 도구 상자이다. 

 

 

 

인흥군 맏아들 묘지명          
조선 1632년, 백자  

두창의 전염률은 겨울부터 초봄까지 가장 높았다. 특히 면역력이 성인보다 더 낮은 유아에겐 치명적이었다. 1603년 겨울은 선조에게 고통의 시기였다. 당시 그는 아들과 딸, 손자를 불과 한 달 사이에 잃었다. 선조 12번째 왕자인 인흥군의 1630년에 태어난 맏아들도 세 살 되던 해 두창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이 백자는 두창으로 죽은 왕실 아기씨의 묘지명이다. 

 

 

 

석조약사여래좌상          
고려 말~조선 초, 석채(부조)  

모든 병과 고통에서 중생을 구하는 약사여래(약사불)를 돌로 표현한 부조다. 매우 간략한 선으로 표현되었지만, 약사불임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제스처를 취한다. 약사불은 다리에 올린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고 오른손을 펴서 땅을 가리키는 향마촉지인을 하거나 가슴 높이로 들어 엄지와 검지, 또는 중지를 맞댄 설법인을 하고 있는 모습이 많다. 이 약사불은 약합을 들고 설법인을 하고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약사여래가 전란과 역병 같은 국가적 재앙에서 구원해준다고 믿었다.   

자료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더네이버, 아트, 조선시대 돌림병

CREDIT

EDITOR : 한지희PHOTO : 더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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