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늦가을은 예술 작품을 경유해 존재의 무게를 느끼기 적당한 계절이다. 삶을 돌아보게 하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을 모았다.
2025.10.27
베트남 중부 산악지대에서 마을을 이뤄 살아가는 룩족은 사라져가는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이다. 베트남 출신 감독 츠엉민퀴와 벨기에 출신 니콜라 그로가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 <머리카락, 종이, 물…>은 룩어의 마지막 화자 중 한 명인 하우의 여정과 언어를 좇는다. 영화는 초반에 하우가 손주를 돌보기 위해 방문한 대도시 호찌민과 룩족의 고요한 마을을 교차하며 대비를 강조한다. 그리고 산에서 흘러가는 하우의 일상과 룩어로 말하는 단어를 담담하게 담아낸다. 소실이 예견된 언어의 소리는 왜 이리도 애틋할까. 하지만 연민도 잠시, 어른이 되면 큰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손자의 명랑한 목소리가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연출 츠엉민퀴, 니콜라 그로

노르웨이 감독 다그 요한 하우거루드의 ‘섹스, 러브, 드림’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사랑을 꿈꿀 때>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됐다. 열일곱 요한네는 학교의 프랑스어 강사이자 직물 아티스트인 요한나에게 반해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강렬한 감정은 일기로 기록하면서 점차 부풀어 오르고 갈증 역시 커져간다. 그러다 요한네가 시인인 할머니, 그리고 엄마에게 일기장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서사의 편집권에 관한 이야기로 흐른다. 일기에 기록한 사건을 두고 당사자의 의견이 갈릴 때, 독자는 어떤 의견을 신뢰해야 하는가. 하지만 영화는 진실 공방에 관심이 없고, 고민의 씨앗만 관객에게 심어둔 채 요한네와 함께 발걸음을 내딛는 결말이 산뜻하다.
연출 다그 요한 하우거루드

오랜 친구 카를로비안키와 도리아노는 영화 제목처럼 <가는 길에 딱 한잔 더>를 외쳐대는 구제불능의 중년이다. 밤거리를 떠돌던 두 사람은 건축을 공부하는 대학생 줄리오와 만나 삼인조로 기묘한 여정을 시작한다. 두 주인공에게는 일상, 줄리오에게는 일탈인 광란의 밤이 이어지고, 모범생 줄리오는 용기를 얻어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감각을 술로 겨우 지워내는 두 중년은 언제나처럼 다시 바보 같은 대화를 주고받을 뿐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의 유한함과 인생의 덧없음을 코미디라는 바탕에 그려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연출 프란체스코 소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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