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색의 런던. 런던은 흐리고 예고 없이 비가 내렸다. 그래서 매일 아침 햇살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계란은 ‘서니사이드업’으로 주문하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유럽도 폭염에 몸살을 앓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떠나왔건만,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비가 내렸다. 몇 벌 안 되는 얇은 아우터를 걸치고 오들오들 떨면서 비를 피할 때면, 영국인들이 트래비스의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를 떼창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왜 <킹스맨> 주인공이 우산을 무기로 사용하게 되었는지도 깨달았다. 매일 가지고 다니니까.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메뉴는 영국 어느 지역에서건 비슷한 구성이다. 베이컨, 베이크드빈, 블랙 푸딩과 토스트. “계란 요리는 어떻게 조리해줄까?”라는 사려 깊은 질문이 이어진다. 스크램블 에그 혹은 포치드 에그? 화창한 날씨를 기원하며 오늘도 서니사이드업.
“영국 음식은 맛이 없다”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아침 메뉴는 풍성하면서도 다소 헤비한 구성으로 명성이 높다. 산업혁명의 주체인 영국은 빠른 도시화와 신선한 식재료의 부재로 장기 보관이 가능한 가공식품과 단순한 조리법이 확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는 배급제가 실시되며 밋밋한 맛의 가공식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아침부터 먹는 소시지, 베이컨, 베이크드빈, 블랙 푸딩 모두 배식과 어울리는 가공 음식이 아닌가.
영국에는 수준급 프렌치, 이탈리안, 차이니스, 인디언 레스토랑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대영제국 시절과 이민자의 영향으로 인도, 중국, 중동, 동남아 등 각국의 음식 문화가 견고하게 뿌리 내린 덕이다. 그럼에도 모던 브리티시 퀴진 (Modern British Cuisine)은 전통적으로 미식 문화가 발달한 이웃나라 프랑스나 이탈리아, 트렌디한 바스크나 노르딕 퀴진처럼 세계적 트렌드를 주도하기엔 부족한 게 아닌가라는 오랜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영국에 관해 글로 배운 모든 편견을 바꿔주었다. 회색의 런던에 해가 비치는 순간과 같이.
영국은 북쪽 지방의 목초지와 저지대의 습지를 따라 애버딘 앵거스, 헤리퍼드, 쇼트혼 등 독자적인 소고기 품종을 길러냈다. 풀을 먹고 자란 이곳의 소들은 주로 곡물을 먹는 한우나 일본 와규와는 육향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넓은 초원에서 자라서 좁은 우리에서 키운 소와 달리 근육 내 지방이 침착되어 있지 않다. 지방은 적지만 굉장히 부드럽다. 품종이 가지는 근섬유가 굉장히 짧기 때문이라고 한다. 풀향이 산뜻하게 입안을 채우고 향긋하고 담백하게 마무리되어 느끼함은 찾을 수 없다. 식자재는 재료가 자란 땅의 성질을 품는다. 영국에서 맛본 스테이크는 넓은 목초지의 테루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섬나라 영국은 북해, 아일랜드해, 대서양, 도버 해협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 덕분에 대구, 청어, 가자미, 홍합, 가리비, 굴 등 해산물이 풍부하다.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마크 쿨란스키가 저서 <대구>에서 “서양의 역사는 곧 대구의 역사”라고 표현했을 만큼 대구는 유럽과 북미의 식문화뿐 아니라 경제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구는 염장 건조하면 장기 보관이 쉬우면서, 저렴하게 대량 공급이 가능했다. 15~17세기에는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프랑스가 북대서양의 대구 어장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산업혁명 시기에는 런던에 대규모 대구 가공 공장이 세워져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영국에서는 서남부 콘월에서 터봇(찰광어), 솔(큰 서대), 고등어가 잡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로프 양식 홍합과 핸드 다이브 가리비가 유명하다. 동부의 강 하구에서는 영국 토착 굴이 다양하게 생산된다. 런던의 버러 마켓에서는 신선한 굴과 해산물을 즐길 수 있고, 메이페어의 ‘스콧’과 같은 해산물 식당에서는 훌륭한 솔 구이를 먹을 수 있다. 영국 전역에서 대구로 만든 최고의 피시 앤 칩을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들판과 바다에서 나는 훌륭한 식재료와 세계적 농작의 표준이 된 농장 문화에도 불구하고 영국 음식이 ‘맛없다’는 인식은 꽤 견고하다. 하지만 그러한 편견을 깨고 한때 영국 음식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요리로 등극시킨 셰프가 있다. 바로 헤스턴 블루멘솔. 그는 요리 학교를 거치지 않고 독학으로 요리를 배웠고, 런던 근교의 전통 펍을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식당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식당 ‘팻덕’은 2004년 미슐랭 3스타를 받고 2005년 월드베스트 50 레스토랑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허기를 채우고 맛만 즐기는 음식이 아니라 여행 온 것 같은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다감각 체험을 제공했다. 메뉴는 시간 여행이나 어린 시절 기억, 환상의 세계 등과 같이 주제를 따라 구성되었고, 해산물을 먹으며 이어폰으로 파도 소리를 들려주는 것과 같이 맛뿐 아니라 청각, 시각, 후각, 촉각까지 동원해 식사하는 경험을 제공했다. 때로는 너무 과하다거나, 분자요리가 이제는 올드 패션드라고 여기는 평론가도 물론 있다.
런던의 만다린오리엔탈의 식당 ‘디너 바이 헤스턴 블루멘솔’은 이번 여름 팻덕 오픈 30주년 기념으로 팻덕의 대표 요리를 코스로 구성한 메뉴를 선보였다. 덕분에 한때 세계에서 가장 핫했던 식당 팻덕의 요리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호텔 레스토랑이나 미슐랭 3스타에 어울리지 않게 캐주얼하고 매우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의외였다. 아이와 함께 방문해도 눈치 보이지 않는 파인다이닝은 흔하지 않다. 마치 영국의 여느 펍에 온 것처럼 흥겨웠다. 이것도 셰프가 의도한 연출일까 궁금했다.
질소에 구운 라임 셔벗이 시작을 알렸다. 팻덕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분자요리 스타일의 오프닝이었다. 서버가 테이블 옆에 액체질소통을 가져와서 막 건져 올린 하얀 라임 셔벗 조각을 입에 넣으면 입안에서 증기가 퍼지고 라임과 허브 향이 목을 타고 올라오면서 혀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식전주와 같이 입안을 깨끗하게 정리하며 미각과 후각을 열어주었다. 이어진 달팽이 요리는 귀리죽 형태로 내주는데, 마치 프랑스의 에스카르고를 향해 여긴 영국이야라고 외치는 것 같은 의외의 등장이었다. 달팽이는 부드럽게 조리되었고 육수는 파슬리로 덮여 있는데 달팽이 특유의 흙내는 육수의 감칠맛과 허브의 상쾌함으로 조화를 이루었고, 올려진 펜넬과 조리된 호두는 음식의 밸런스와 식감을 동시에 잡아주었다. 세 번째 요리는 구운 가리비로 화이트 초콜릿 소스와 캐비아를 곁들였다. 단짠의 극적인 대비가 팬에 잘 구워진 가리비 관자의 바다 향과 함께 긴 여운을 남겼다. 생선 요리는 터봇(찰광어)이 나왔다. 터봇 특유의 탄력 있는 식감을 잘 살렸고, 샴페인 소스는 홍합, 청포도, 파슬리와 절묘한 어울림을 드러냈다. 포도의 단맛과 해산물의 감칠맛이 샴페인 소스의 산미와 어우러져 섬세한 균형을 이루었다. 코스의 정점은 소고기 요리였다. 소의 혀와 등심을 저온에 조리해 훈연 양파를 곁들이고, 팻덕의 전설적인 ‘트리플 쿠킹 칩스’를 함께 제공했다. 소고기는 지방 하나 없이 붉었지만 그간 먹은 어떤 소고기보다 부드러웠다. 육향은 초원에 서 있는 것처럼 상큼하고 청초했으며, 진한 소스는 어느 맛 하나 과하지 않게 밸런스를 잡아주었다. 디저트는 영국의 아이스크림 퀸이었던 아그네스 마샬 여사의 레시피로 만든 아이스크림과, 독일 흑림 지방의 전통 케이크를 팻덕 스타일로 재창조한 다크 초콜릿 무스였다. 진한 카카오 풍미와 체리의 상큼함이 알코올 향과 조화를 이뤘다.
누가 헤스턴 블루멘솔이 올드 패션드라고 이야기했는가? 오픈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영국의 현재였다. 그리고 ‘힙’하다는 어떤 레스토랑과 비교해서도 그 에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번 30주년 기념 메뉴에는 한 접시 한 접시마다 셰프가 걸어온 길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창의적인 조리법과 테이블 옆에서 직접 보여주는 과학시간 같은 퍼포먼스는 모든 감각을 깨우는 듯했다. 음식의 리듬은 활기찬 식당 분위기와 함께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겼다.
런던에서 맛있는 영국 전통 음식을 기네스와 즐기고 싶다면 소호에 있는 데본셔(The Devonshire)를 찾아야 한다. 1793년 펍으로 문을 연 데본셔는 2023년 런던의 기니 그릴을 이끈 오쉰 로저스, 유명 스테이크 체인인 플랫 아이언을 경영하는 찰리 캐럴, 그리고 앞서 언급한 팻덕 출신의 애슐리 파머가 힘을 합쳐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 재개관했다. 이후 런던에서 가장 크리미한 기네스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이제는 자리를 잡기 어려운 식당이 되었다. 1층은 바 공간으로 기네스와 간단한 스낵을 제공하는데, 이른 저녁부터 런던의 직장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2층부터는 그릴룸으로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레스토랑으로 운영되는데, 벽면에 설치된 전통 오븐은 ‘영국식 그릴의 근본’이라는 아우라를 풍긴다. 요즘 바스크식 파리야(parrilla) 장작 그릴에 높이 조절을 하며 직화로 굽는 스테이크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데 영국 전통 오븐에 구운 스테이크는 어떨지 궁금했다.
데본셔의 기네스는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리미하고 향기로웠다. 어떤 인위적 첨가물도 느껴지지 않았다. 구름처럼 폭신한 크림에 이어 첫 모금에 로스팅한 보리의 고소함이 올라왔으며, 곧바로 다크 초콜릿과 커피, 헤이즐넛 향이 겹겹이 피어났다. 쓴맛은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웠다. 마지막엔 달큰한 몰트의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생각 날 맛임에 분명했다.
스테이크가 가장 유명하지만, 데본셔의 이베리코 립 역시 결코 놓쳐선 안 되는 메뉴다. 포크로도 부드럽게 떨어지는 살코기의 맛은 한국의 돼지갈비보다 허니 글레이즈드 양념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지고, 숯에 강하게 익힌 표면이 적절한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켜 감칠맛과 스모키한 풍미가 크리미한 기네스와 더없이 어울렸다. 데본셔 2층에는 거대한 오븐이 있는데 고대의 난로처럼 무겁고 견고한 주철로 된 문 사이로 타오르는 불꽃이 보인다. 오븐은 고기 겉면에 불향을 극적으로 입히고 내부는 육즙이 살아 있는 미디엄 레어 상태를 유지해주는데 장작의 숯 향은 가스불과는 다르게 원초적이면서도 깊은 향을 만들어낸다. 데본셔의 오븐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테이크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올랐다. 스테이크 겉면은 호박색 크러스트와 함께 제대로 익었고 은은한 숯 향이 올라왔다. 드라이에이징되어 산뜻한 단맛으로 시작해 견과류, 치즈 같은 풍성한 향으로 이어졌다. 숯불의 그을음과 고소한 지방의 여운이 남을 즈음 기네스를 마셔준다. 영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다.
떠나는 날까지 런던은 회색이었다. 가끔 나타나는 햇살이 더욱 반갑고 귀한 이유였다. 비틀스의 ‘Here comes the sun’ 노래처럼. 영국 음식은 맛이 없다는 편견에서 시작해서 영국의 맛을 탐색해가는 과정은 즐거웠다. 영국 시골 초원에 자유롭게 다니는 소와 말을 보면서 다시 한번 재료와 테루아를 생각했다. 가장 영국다운 음식을 통해 비로소 오래된 편견이 깨어졌다.

1 이베리코 립과 기네스. 2 가리비 관자 구이와 크럼블. 3 터봇 구이. 4 랑구스틴 구이.

1 중세 레시피를 활용한 비프스테이크와 트리플 프라이(Alows of beef). 2 달팽이 귀리 죽. 3 헤리퍼드 립아이 스테이크. 4 청포도를 곁들인 터봇 요리(Turbot Véronique).
더네이버, 라이프스타일, 다이닝
EDITOR : Jeik Byun(미식 칼럼니스트)PHOTO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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