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땅에서 식탁까지, 자연을 요리하는 방법

채소가 주인공인 식탁. 자연을 접시 위에 스케치하는 셰프들의 이야기.

2025.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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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가 파인 다이닝 식당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그간 채소는 어디까지나 고기나 생선 메인 디시에 곁들이는 조연이었고, 식감을 더하거나 신선함, 향을 강조하는 등 제한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채소가 파인 다이닝 식탁의 스타로 부상한 데는 알랭 파사르(Alain Passard) 셰프의 역할이 컸다. 그는 넷플릭스 <셰프의 테이블> 프랑스 편에 가장 먼저 소개된 셰프이자 한국에서는 2022년 루이 비통 메종 서울에서 팝업을 진행하여 이름을 알렸다. 알랭 파사르 셰프는 2001년 자신의 미쉐린 3스타 식당에서 육류 메뉴를 없애버렸다. 잘 로스팅한 송아지 요리로 명성을 쌓은 식당에서 고기가 사라지자 단골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값비싼 식당에서 채소만 먹으란 것인가? 하지만 무모한 도전이라고 폄훼한 평론가들도 파사르가 접시 위에 그린 철학과 계절감, 그리고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창의성과 기술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이들이 미쉐린 스타를 잃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3스타를 유지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맛의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파인 다이닝 역사의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오늘날 아르페쥬(Arpège)는 전 세계 미식가들 사이에서도 성지와 같은 곳으로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채소가 주인공이 되는 파인 다이닝이 새로운 장르는 아니나 한 시대의 서막을 알린 전설적인 식당을 향하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기대에 차 있었다. 지난 파리 일정에 가장 먼저 예약을 서두른 곳 역시 아르페쥬였다. 무거운 출입문이 열리는 순간 주말 미사 시간에 성당에 발을 디디는 것처럼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미식의 성지에 발을 내딛는 순간. 


채소는 늘 차분하고, 말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편안하다. 아르페쥬에 들어서는 순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벽면 구석구석 채소와 농장의 풍경이 섬세한 수채화로 장식되어 있고, 선반 위에는 그날 수확한 각종 채소가 무심한 듯 꽂혀 있다. 활기찬 서버들의 모습과 내추럴한 채소 세팅, 싱싱한 생명의 향으로 산뜻함이 가득했다. 


식사는 역시 ‘오늘의 채소’로 시작되었다. 하얀 접시 위에 채소로 붓질한 것 같은 예술적인 플레이트였다. 호박꽃, 완두콩, 당근, 각종 무, 각종 호박, 엔다이브 등 색 고운 채소가 조화롭게 놓여 있었다. 마치 액자에 걸린 미술 작품처럼 아름다웠고, 채소 하나하나의 맛이 뚜렷하고 다채로웠다. 청량하고 아삭거리는 식감 사이로 감칠맛이 은은하게 채워졌다. 채소만으로 이렇게나 인상적인 맛을 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조리되지 않은 채소가 이렇게 긴 여운을 남기다니. 


이어서 나온 ‘따뜻하고 차가운 메이플 계란 반숙’은 아르페쥬의 시그너처 요리 중 하나다. 몽글하게 반숙된 노른자는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있고, 그 위로 매우 얇게 메이플 시럽, 약간의 셰리 비니거, 부드러운 크림이 겹겹이 얹혀 있다. 온도와 질감, 단맛과 산미가 정교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단순히 계란일 뿐인데, 한 숟가락 안에 지극한 섬세함이 응축되어 있었다. 얇게 저민 무와 래디시 디시에는 오일, 레몬의 산미가 아주 희미하게 감돌았다. 불맛도 향신료도 없었지만 입안에서는 크고 또렷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시금치 요리, 아티초크 수프와 고트치즈, 감자 요리, 아스파라거스와 조개 요리가 이어졌다. 대지의 감촉과 자연 그리고 계절의 흐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흘러갔다. 마침내 등장한 비트 타르타르에서는 셰프의 재치를 엿볼 수 있었다. 비트, 셀러리악, 적양파 등 다양한 뿌리채소를 정밀하게 다져 마치 소고기 타르타르 위에 계란이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입에 넣는 순간 미각의 착각을 유도하려는 장난스러운 면모 이상의 감동이 있었다. 육질과 같이 식물성 크림이 붉은빛의 부드러운 채소들과 결합하여 인상적인 맛을 내었다. 


오늘날의 아르페쥬는 원하는 고객들에게 브레스 닭, 오리, 양, 블루랍스터 등 다양한 육류와 생선 메인을 제공한다. 옵션으로 추가한 메인 디시 랍스터의 조개육수 베이스 버터 소스는 깔끔했고, 거대한 블루 랍스터의 익힘 정도는 완벽해서 혀에 닿자마자 사라질 정도였다. 얇게 깔린 레몬 제스트와 타라곤은 산뜻하고 달달한 육질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마무리로 나온 시그너처 애플 타르트와 정원에서 딴 허브차는 더할 나위 없었다. 채소로는 부족한 이들에게 풍성한 옵션을 더하고 있지만, 그의 식당에서 위풍당당하게 빛나는 시그너처 메뉴,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여전히 채소 디시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파리에서 자연주의 파인 다이닝으로 잘 알려진 또 다른 식당으로 브루노 베르주(Bruno Verjus) 셰프의 따블(Table)이 있다. 브루노 베르주 셰프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의사였던 그는 작가, 음식 평론가,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하였고 쉰이 넘은 나이에 요리를 시작했다. 이제는 미슐랭 2스타이자 2025년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의 3위에 이름을 올린 프랑스 요리계의 이단아다. 그의 철학은 명확하다. 모든 맛은 재료에 있다. 그는 매일 프랑스 전역의 농부, 어부들과 연락하며 식재료를 선택한다. 그래서 식당의 메뉴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계절과 날씨, 토양과 바람의 변화가 그날의 요리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날 들어온 최고의 재료를 살짝만 익혀서 최소한의, 라이트한 소스와 함께 제공한다. 그는 요리를 ‘자연의 번역’이라고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글이나 그림, 음악으로 표현하는 작가처럼 요리하는 방식이 아닌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인정받고자 한다. 


따블은 캐주얼한 분위기에 활력과 에너지가 넘친다.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셰프가 직접 환한 웃음으로 나와 반겨준다. 첫 번째 요리는 오늘의 채소들이다. 그날 수확한 야채들이 플레이트 위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녹색과 붉은색 소스는 추상화같이 현대적이고 세련된 멋을 낸다. 오늘은 랑구스틴이 크고 실하다며 추천을 날린다. 랑구스틴은 한국의 딱새우와 비슷하지만 훨씬 크고 단맛이 좋다. 최소한의 조리만으로 제공된 랑구스틴은 단맛과 감칠맛이 극대화되었다. 랍스터 요리도 등장했는데 녹색과 노란색 채소를 곁들인, 레어에 가까운 상태로 제공되었다. 부드럽고 투명한 살 위로 해초 소스가 뿌려졌고, 그 육질과 채소, 소스의 조합은 자연 그대로의 맛을 담고 있었다. 


서울에서 자연을 그대로 전달하는 파인 다이닝으로는 회현동의 기가스를 꼽을 수 있다. 정하완 셰프는 와니농장을 운영하며 직접 농사를 짓고 그 작물을 손수 다듬어 요리에 담아낸다. 농장은 식당의 뿌리다. 여름에 토마토와 가지와 호박꽃, 가을의 단호박과 배추와 각종 버섯, 겨울의 뿌리채소들, 모두 정하완 셰프가 직접 길러내는 토종 작물이 유통을 거치지 않고 바로 주방으로 옮겨진다. 그만큼 채소의 싱싱한 생명력을 그의 요리를 통해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 자라는 채소로 한국의 계절을 표현한다는 그의 철학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햇살이 길게 들어서는 피크닉의 큰 창 너머로 푸른 녹음이 넘실거린다. 베지테리언 코스와 일반 코스로 나뉘지만 모두 다채로운 채소가 디시의 주인공이다. 관자 요리엔 직접 키운 허브를 갈아 만든 퓌레가 깔리고, 모차렐라 크림과 돼지고기가 섬세하게 균형을 이룬다. 훈연 향과 육류의 단맛이 허브의 쌉싸래한 맛과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고등어 에스카베체는 추자도에서 올라온 고등어와 고수, 유자, 초피, 신선초, 시금치, 원추리 같은 들풀이 함께 어우러지는 대담한 구성이다. 한국 전통 허브의 맛이 고등어의 가득 찬 기름기에 잘 스며들어 어울린다. 산양유로 만든 치즈와 조린 우엉, 곶감이 어우러진 디저트는 계피 향을 입고 과수원에서 나는 은은하고 달콤한 향을 잘 살려준다. 


기가스의 접시 위로 계절이 흘러간다. 가장 깊은 맛은 가까운 땅에서 자란다. 땅에서 식탁까지 자연을 요리하는 셰프들의 이야기 는 오늘도 이어진다.   

 

 

 

기가스

1 추자도 고등어와 감자, 유자, 초피 그리고 허브 소스가 잘 어울린다.
2 서해 관자에 와니농장에서 직접 키운 허브를 갈아 만든 퓌레, 루콜라, 딜꽃 그리고 이베리코 팔레타가 조화롭다.
3 튀긴 케일 크리스프와 아스파라거스를 얇게 슬라이스한 애호박에 말아 만든 채소 롤은 와니농장과 기가스를 연결하는 아이덴티티를 보여준다.
4 얇게 슬라이스한 배를 한국식 크럼블과 함께 제공하여 계절감을 살린 디저트.

 

 

 

 

아르페쥬

1 오늘 수확한 채소 플레이트는 하얀 접시 위에 붓질한 것같이 예술적이면서도 감칠맛과 여운이 인상적이다.
2 얇게 저민 순무와 래디시 그리고 레몬의 산미가 조화롭다.
3 얇게 썬 감자와 터닙을 그라탕 스타일로 구워 로메인을 얹은 요리.
4 부드러운 반숙 달걀과 발사믹 크림, 그리고 차이브 토핑으로 완성된 시그너처 요리로 따뜻함과 크리미한 풍미가 허브와 잘 조화된다. 

 

 

 

 

따블

1 셀러리악, 고사리순, 차이브 꽃과 셀러리 잎, 허브 소스로 맛을 낸 계절 요리.
2 그날 잡힌 거대한 랑구스틴을 최소한의 터치로 재료 본연의 맛을 끌어낸다.
3 따블의 시그너처 중 하나로 정어리를 가볍게 마리네이드하고 타라마 소스와 허브 오일로 마무리하여 궁극의 감칠맛을 선사한다.
4 오늘의 채소 플레이트는 맛뿐 아니라 재료와 소스의 색채가 조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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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Jeik ByunPHOTO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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