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젊은 철학자의 서정시, 안드레이 두브라브스키

안드레이 두브라브스키의 작품엔 다층적인 시간과 공간이 내재되어 있다. 마치 폭풍같이 강렬하지만 어느새 안온함이 흐르는 한여름의 서정처럼. 이 슬로바키아 태생의 작가는 그 중의적인 풍경을 읊조리는 철학자가 되어 동시대가 직면한 현상들에 관한 진지한 사유를 자신만의 강렬하고도 위트 있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202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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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핌 서울 갤러리에서 만난 안드레이 두브라브스키. 

 

오픈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한남동의 갤러리 핌 서울(FIM SEOUL)에서 아주 신선한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하는 슬로바키아 작가, 안드레이 두브라브스키(Andrej Dúbravský). 4월 19일까지 한 달여 이어질 전시 오픈을 앞두고, 작품 설치를 막 끝낸 핌 서울에서 내한한 안드레이 작가를 만났다. 아시아에서 처음 소개하는 전시를 서울에서 열게 되어 기쁘고 영광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흥미로운 반전의 이미지를 포착했다. 이를테면 20대 같은 힙한 청춘의 에너지가 느껴지지만 30대 후반이고, 석사를 마치고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며 10여 년의 경력을 쌓아왔다는 것, 뉴욕과 베를린 등에서 주로 활동하지만 슬로바키아 남서부의 시골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거나 하는. 그러한 반전은 작품에도 촘촘하게 반영돼 있다. 시골집 정원과 농촌 풍경에서 영감을 받지만 그 안에는 정치와 산업, 성과 정체성 같은 동시대적 문제들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탐구가 겹겹이 담긴다. 아름답고 때로는 신비하며, 풍요롭게 생동하면서도 사회와 환경, 역사 속 상실에 대한 감수성을 자유롭고도 냉철하게 표현해낸다. 그러한 중의적이고 이분법적인 현상을 은유하는 회화의 주요 매개체는 자연의 풍경과 동식물의 초상, 그리고 자화상과 남성 인물의 초상이다. 날갯짓을 하며 꽃 위를 날아다니는 벌, 호숫가에 누워 한적한 시간을 보내는 소년들과 노인, 머리에 뿔을 단 소년의 두상… 상이하면서도 일관된 하나의 알레고리로 엮어 다채로운 시공간을 경험하게 한다. 

 

이번 전시 타이틀인 <두 여름의 폭풍 사이 지역 철학자(Local Philosopher between Two Summer Storms)>는 어떤 의미인가? 
작년 여름부터 떠올리고 공글려온 테마인데, 스케치만 해두고 작업은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다. 슬로바키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 지역이라 여름에 굉장히 덥고 건조하다. 여름 풍경 그림들의 배경이 된 슬로바키아의 인공 호수는 실제로 내가 여름을 보내며 색다른 시간을 갖는 장소이다. 호수를 찾는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동안 내가 그들에게 사회적 문제에 관한 생각을 얘기하거나 조언을 건네기도 하는 나이 든 그 지역의 철학자 같다고 생각했다. 전시 타이틀은 그런 부분을 투영한 것이다. ‘두 여름의 폭풍’이란 계절의 흐름을 담은 시간적 의미인 동시에 이중적 의미도 담고 있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신선하고 멋진 반면 어둡고 파괴적인 폭풍 같은 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유쾌하면서도 다크한,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를 혼합하고 싶었다. 


슬로바키아 시골과 정원의 풍경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나?   
슬로바키아 시골집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특별한 장소다. 보통 여름에는 아이디어를 떠올려 스케치하고 겨울에 그걸 발전시키는 식으로 작업한다. 주로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야외의 여러 요소가 캔버스 표면이나 페인팅 스타일에 많이 반영된다. 아주 더운 날이 이어질 때면 모든 걸 빠른 시간 안에, 러프하고 즉흥적으로 처리할 때가 많다. 정원에 물을 주고 호수에서 잠깐 수영하고 나서 그림을 그리거나, 약간 더럽히는 제스처를 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흙이 묻거나 내가 키우는 닭의 발자국이 그대로 찍히면서 작업에 흥미로운 요소를 더한다. 어릴 땐 자연과학자도 꿈꿨지만, 아티스트로서도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더 잘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구실이 아닌 정원에서 식물을 키우고, 이 식물들로 벌 같은 곤충을 끌어들이는 현상 등에 몰두하는 것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호숫가에 앉아 있는 남성 인물들, 뿔 달린 소년의 두상, 꽃 위의 벌 등 작가의 주요 최근작을 다양한 예전 작업물들과 함께 중첩해 설치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으면서도 산업, 정치, 성, 정체성 같은 시대 문제를 담아내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시골에서 식물을 키우고 곤충에 집중하며 작업하고 있지만 동시대의 사회 현상을 보고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의식이 자연스레 반영되는데, 어떤 심각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어둡게만 표현하는 대신 오히려 아름답게 묘사한 그림을 통해 생태계나 기후 위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세계의 정치·사회적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긴 어렵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호수에서 보내는 여가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기다란 벽면과 중간 파티션 벽 앞뒷면의 액자 작품들 뒤로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 천들을 중첩해 배경으로 설치한 것이 시선을 끈다.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
다양한 사이즈의 이전 작업을 자유롭게 중첩해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레이어드한 설치는 관객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층위를 나타낸다. 동시대의 문제들을 보다 다양하게 바라보고 좀 더 폭넓은 시야를 갖기를 기대하며 만든 작업이랄까. 이번 전시는 작품이 적지 않다. 처음엔 작년 10월에 연 슬로바키아의 개인전과 마찬가지로 벌을 소재로 한 작품만 전시하려고 했는데, 한국 관객에게 처음 선보이는 자리이니만큼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줬으면 하는 핌 서울의 의견을 따랐다. 한국 관객이 재미있게 보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1 꽃 위를 유영하는 암컷 일벌들이 꽃가루를 흩트리는 이미지를 독창적이고 과감한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했다. ‘Blue pollen and two bees learning the power of high five’, 2025, Acrylic and oil pastel on canvas, 120×100cm. 2 예전 스튜디오 작업들을 겹겹이 덧붙여 작은 노트처럼 연출한 작품. 관객이 캔버스 천을 하나씩 넘기며 감상하는 방식이 흥미를 유도한다. 3 자신의 작업에 대해 진지하면서 유쾌하게 얘기하는 안드레이 두브라브스키. 

 


‘벌’이 이번 전시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이 일벌들은 나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현대인의 바쁜 삶을 대변하는 존재이다. 그런 한편 벌은 꽃과 식물의 번식을 책임지는 생태계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자연과 기후 위기의 위협을 암시하고 있지만, 과감하고 다채로운 색채와 이미지로 구현해 아름다운 생명력을 지닌 자연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뿔 달린 남성 인물은 무엇을 상징하나?
바로크 시대의 화가 루벤스나 고대 로마의 미술에서 영감 받은 것이다. 인물이면서 인물이 아니기도 한 기이한 신화적 존재들이 지닌 표현적 특성을 참조했다. 현대사회에서는 일반 사람이 다르다고 느끼는 성소수자 같은 개념과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체를 흥미롭게 표현한 바로크 시대 작품들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 편이다. 각 작품에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의 예술 역사와 회화에서 비롯된 작은 힌트들이 숨어 있으니 관람하며 찾아보시길 바란다.


벌이나 인물 초상이 스트라이프 패턴과 교차하는 표현도 당신만의 고유한 회화적 언어인가?
줄무늬는 나의 내밀한 개인적 삶에서 비롯한 노스탤지어와 연결된다. 예전 나의 조부모님 몸에 가장 가까이 닿는 직물들, 언더웨어나 파자마, 혹은 침대 시트에서 주로 보던 패턴이다. 땀이 밴 그 직물들을 세탁해 야외 정원에서 말릴 때 벌들이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모습에서 영감 받은 것으로, 스트라이프 패턴을 좀 더 확대해서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내게는 슬로바키아의 인공 호수처럼, 자극과 스트레스가 만연한 세상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는 장치이다.


작품의 색감이 몽환적이고 무척 신비롭다. 과감하고 풍부하기도 하면서 단색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흑백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다. 점진적으로 변화하다가 최근에 컬러를 풍성하게 넣은 작업을 많이 하는데, 색을 쓰는 건 내게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더 아름다운 컬러를 쓰기 위해 꾸준히 연구한다. 예를 들어 멸종 위기의 벌을 그릴 때 아름다운 컬러로 표현해 보는 이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싶다. 


자연의 평화로움과 생명력에서 영감 받는 예술가로서, 지속 가능한 자연 환경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주 사소하고 작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내 작품을 보고 벌들이 찾아오는 식물을 심을 수 있겠지. 실제로 인스타그램(@andrej_dubravsky) 팔로워들이 내가 추천한 식물을 심었다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내 작업을 통해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워줄 수도 있고. 예술 애호가뿐 아니라 패션과 스타일에 관심이 높은 도시인에게도 자연을 더 아름답게 소개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거다. 최근엔 고양이 곤충학자가 다양한 곤충을 발견해가는 내용의 아동 도서 제작에 참여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재미있게 작업한 책으로 이번 봄에 발간할 예정이다.


지금 가장 관심 있는 현상이나 주제는?
슬로바키아는 지금 정치적으로 혼란한,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차분하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대응할 수 있을지가 요즘 고민하는 나의 최대 화두다. 때때로 나는 나이 든 몸에 갇혀 있는 10대 소년 같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나의 놀이터인 스튜디오에 있을 땐 꿈 많은 10대처럼 하고 싶은 것이 굉장히 많이 떠오른다. 정말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형편없는 그림도 물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선 실질적으로 어려운 문제도 많다는 걸 알고 있고, 스스로를 절제하고 신중해지려고 노력한다. 


전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안드레이 두브라브스키라는 아티스트의 다음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다음에 어떤 작업을 할지는 잘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계속 좋은 갤러리,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싶다는 점이다. 이건 아티스트에게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또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작업할 때 발견하는 어떤 욕구나 충동이 내 안의 예술적 영혼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단순히 트렌디해서 하고 싶은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 자신을 스스로 더 잘 알고 이해해야 더 좋은 예술가, 더 좋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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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이정주(freelancer)PHOTO : 김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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