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음식은 그날 마주한 공간과 향기, 소리까지 온전히 기억하게 한다. 가이세키 요리가 그렇다. 계절과 자연, 전통과 현대적 감각, 고유의 물맛까지 담아 완성하기 때문이다.
2025.03.12
도쿄의 저녁은 서울보다 따뜻했다. 멀리 보이는 도쿄 타워는 적외선처럼 붉은빛을 뿜어내며 손을 대면 난로처럼 따스한 온기를 전해줄 듯이 빛났다. 도쿄 여행을 확정 지으며 첫 타자로 예약한 기쿠노이 아카사카는 교토에 본점을 둔 가이세키 요리 전문점이다. 입구로 가는 짧은 길을 장식한 전등이 그윽한 운치를 더했다.
내가 처음 가이세키 요리를 접한 것은 두 번째 직장 생활 시작을 앞두고 아내와 떠난 교토 여행에서였다. 고즈넉한 사찰 앞, 그 역사가 무려 100년이 넘는 고다이지 와쿠덴. 늦여름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고 버드나무가 늘어진 사찰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예약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서자 단정하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정중하게 맞아주었다. 개인 방이 없어서 다른 손님과 기역 자 카운터 좌석을 공유해도 괜찮을지 양해를 구했다. 옆자리의 중년 부부는 젊은 한국인 커플이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신기해하며 말을 걸어왔다. 테이블 뒤 깊은 돌화로 너머로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요리사가 한눈에도 최상급으로 보이는 숯을 피웠고, 충격적으로 맛있는 가지를 구워 내주었다. 모든 재료에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찰나의 계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요리를 장식하는 노란색과 짙은 붉은빛을 띠는 잎들이 아름다웠는데, 매일 주변의 예쁜 나뭇잎을 줍는 것이 일이라는 푸념 섞인 농담을 덧붙였다. 바구니에 담긴 10가지가 넘는 종류의 버섯은 직접 기르고 채집한 것이라고 했다. 버섯을 넣고 끓인 맑은 다시는 향이 다채로웠다. 곧이어 등장한 구이 요리는 와쿠덴의 시그너처 메뉴로, 최고급으로 꼽히는 한국산 송이를 장어에 싸서 숯에 구워 낸다는 설명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단순한 조리 과정에도 깊은 감칠맛과 은은한 향이 길게 이어져 감탄했다.
도쿄의 빌딩 숲을 헤매다가 기쿠노이 현판 앞에 서면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교토의 오솔길처럼 굽이쳐 들어가는 입구를 마주한 순간 서울에 오픈한 유성엽 셰프님의 산로가 생각났다. 차가운 청담동 건물 내에 자리하지만, 굽이굽이 들어서는 입구로 향하는 순간만큼은 마치 일본 사찰 앞 마당으로 순간 이동한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좋은 음식은 그날 마주한 공간과 향기, 소리 모두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알려주는 듯이. “가이세키는 음식을 통해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의 맛입니다. 다시 맛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지거든요.” 자칫 어려울 수 있는 가이세키를 한국 재료로 유려하게 풀어내는 유성엽 셰프님의 설명이 떠올랐다. 기쿠노이에서 오랜 기간 수련하고 부주방장을 지냈지만 그저 배운 대로 음식을 낸다는 겸손한 말씀이었다.
가이세키는 일본 사찰에서 차를 마시기 전 허기를 달래기 위해 준비된 음식에서 기원했다.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이 아니라 음식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느끼는 것이 본질이다. 기쿠노이 안에 들어서자 기쿠노이의 주인이자 정신적 지주인 요시히로 무라타 셰프님이 카운터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얼굴은 호랑이 같았고 자세에서 묵직한 기품이 전해졌다. 한 달 중 일주일은 도쿄에 머물고 나머지는 교토에 상주한다니 타이밍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만 본 무라타 셰프님이 직접 플레이팅하는 음식을 즐길 수 있다니! 최근 한국에서 경험한 가이세키와 본고장의 맛은 어떻게 다를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한 발걸음인데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낮은 접시에 웰컴드링크가 담겨 나왔다. 산로에서는 막걸리 질감의 탁주가 시작이었다. 깔끔한 기쿠노이 청주를 마시니 마음이 정화되고 극진한 초대를 받은 듯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음식은 초쿠. 계절을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앞으로 전개될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오늘의 초쿠는 해삼 내장과 구운 가리비 관자로 만든 부드러운 완자 위에 뭉근한 다시를 올린 것이었다. 겨울의 냉기와 고요함이 남아 있지만 추위가 한풀 꺾이고 봄을 맞이하는 맑고 투명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어진 핫슨은 정어리 스시와 전복 그리고 매화젤리로, 가운데 장식한 매화 한 송이가 봄의 시작을 전한다. 무코즈케는 참돔, 닭새우(이세에비), 그리고 참치회를 내어주었다. 깊은 바다의 신선함을 담은 참돔은 새싹, 간장과 함께 먹었고, 닭새우는 달큰한 피니시가 길게 이어졌다. 참치는 달걀노른자 소스와 함께 내어주었는데 듬뿍 찍어 먹어도 거북하지 않고 참치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간과 향에 놀랐다. 초록색의 정교한 매화 모양 그릇에서 정성과 세심함이 엿보였다.
다음으로 등장한 후타모노는 코스 중 가장 놀라운 요리였다. 백합으로 만든 만두 속에는 메추리알과 푸아그라를 완자처럼 채워 넣고, 그 위로 트러플을 올렸는데, 국물은 중국풍으로 트러플 맛이 깊게 감돌았다. 무라타 셰프님은 오랜 역사 속에서 전통 기법을 지키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감각을 더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단순한 식사를 넘어 계절과 자연, 정서까지 담아내려는 고민과 철학이 느껴졌다. 하지만 요리를 통한 그의 철학은 어렵지 않고 즐거운 경험으로 온전히 전달되었다.
대구 이리로 만든 달걀찜과 에치젠에서 잡은 대게구이가 이어졌다. 마블링이 좋은 소고기 샤부샤부, 샥스핀과 자라 국수 식사까지 마치니 더 이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가 불렀다. 하지만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기름기 있는 음식의 마무리로 등장한 구마모토산 오렌지 아이스크림과 오렌지 필 모찌 디저트는 상큼한 감칠맛으로 입안을 개운하게 했다. 오렌지의 상큼함이 다시의 깊은 향에 경쾌함을 더해 음식에 생동감이 넘쳤다고 말씀드리자 무라타 셰프님이 선물로 구마모토산 오렌지를 손에 쥐여주었다. 도쿄의 겨울은 따뜻했고 기쿠노이는 계절과 자연, 공간과 향기, 전통과 현대적 감각 모두를 아우른 감동적인 한 끼를 정성껏 선물해주었다.

기쿠노이에서 도쿄에 오픈한 지점. 미쉐린 2스타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교토의 본점과 동일한 음식을 제공하며, 재료를 매일 교토에서 공수하는데 무엇보다 물도 교토에서 가져와 사용한다. 도쿄의 스카이라인 아래로 고즈넉한 교토의 앞마당을 꾸며두어 과거와 현대가 만나는 대화의 장이면서 정체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Add. 6 Chome-13-8 Akasaka, Minato City, Tokyo 107-0052, Japan

1870년경 료칸 형태로 문을 열어 현재는 교토 내 여러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중 고다이지 와쿠덴은 교토를 대표하는 가이세키 음식점으로 전통 격식을 지키면서도 단순하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자연적인 조리법으로 유명하다. 유서 깊은 교토 히가시야마를 배경으로 현대적 감각을 더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Add. 512 Washiocho, Higashiyama Ward, Kyoto, 605-0072, Japan

유성엽 셰프가 기쿠노이 혼텐에서 6년간 근무하고 외국인 최초 부주방장으로 근무한 후 서울에 오픈한 가이세키 음식점. 교토를 서울로 가져온 듯한 공간과 맛을 느낄 수 있다. 배운 대로 정성스럽게 낸다는 겸손한 성품이 그대로 음식에 녹아 있다.
Add. Seoul, Gangnam District, Dosan-daero, 518 2층
writer Jeik Byun(미식 칼럼니스트)
더네이버, 라이프스타일, 여행
EDITOR : Jeik Byun(writer)PHOTO : Jeik B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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