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유랑하는 문구인, 김규림

수집가의 방 Vol. 1

2025.03.07
페이스북 트위터 링크

 

“문구인.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암실에 빛 한 줄기가 쨍 하고 들어와 온 방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 문구인이라는 세 글자엔 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저서 <아무튼, 문구>의 첫 장에서 저자 김규림은 자신의 삶을 정의할 수식어를 발견한 기쁨에 대해 썼다. 초등학생 때부터 문방구를 돌며 새로운 문구를 찾아다니던 될성부른 ‘문구 얼리어답터’는 배민문방구 마케터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현재는 뉴믹스커피 디렉터로서 브랜드를 발전시켜가고 있다.


작은 물건을 모으는 사람의 수집품을 들여다보는 ‘수집가의 방’ 시리즈 시작으로 그의 집 문을 두드린 이유는 그가 오랜 시간 문구와 함께 살아와서다. 애호의 세월을 양분 삼아 여러 채널에서 소장품을 소개하고 직접 문구를 제작하기도 한 그는 최근 유튜브 채널 <김규림의 소비 예찬> 시즌 2를 시작해 애정을 아낌없이 발화하는 중이다. 영상에서 오래 사용한 만년필을 잃어버린 절망감을 토로하고, 집에 불이 나면 가장 먼저 챙길 물건으로 빈티지 연필 홀더를 소개하니 그가 진정 가까이 둔 물건이 궁금해졌다. 목제 가구 가득한 그의 집에서 작은 물건들에 둘러싸인 채 탐색의 역사를 짚었다.

 

 

1 애용 중인 더 슈페리어 레이버 버건디빛 가죽 필통. 2, 3 캐멀색 가죽 다이어리 커버와 안경. 4 파버카스텔 엠비션 코코넛 만년필. 5 파이롯트의 인테그럴 닙 만년필 뮤 701. 6 그림 그릴 때 주로 사용하는 펜텔 S520 사인펜. 7 1970년대 출시된 파이롯트 엘리트 만년필. 8 L&C hardtmuth의 삼각 연필 홀더. 9 포인트오브뷰 다이어리. 10 일러스트레이터 R. O. 블레크먼과 협업해 제작한 양장 노트. 11 황동 펜 홀더. 12 대학 입학 후 구입한 가죽 필통. 

 

 

문구 애호의 역사를 돌아보자. 필기구 버전의 인생 곡선을 그려보면 어떨까.
출발점은 글씨를 쓰기 시작한 유치원 때다. 쭉 상승 곡선을 그려 고등학생 때 정점에 달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의 동기를 문구에서 찾았기에 이것저것 써보며 책상에 앉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구축했다. 그러다 대학 입학과 함께 곡선이 하강했다. 공부 안 하고 놀기에 바쁜 때라 4색 볼펜 한 자루만 챙겨 다니기도 했다. 직장인이 되자 문구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2015~2016년부터 개인 창작자와 작은 브랜드가 많아진 것이다. 쓸 만한 제품을 조사하거나 직접 만들기도 하고, 해외의 재미난 물건을 찾아다니며 상승세가 이어졌다. 


과거에는 어떤 문구를 애용했나?
어린 시절 집에 각종 도구가 많아 자연스럽게 문구를 접했다. 또 아빠가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까렌다쉬의 빨간색 3단 필통을 선물로 사오셨다. 그런 식으로 문구 생활을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는 라이브펜을 색깔별로 전부 사서 하나하나 펜 띠를 두를 정도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펜을 정리하려고 보니 서랍에서 수천 자루가 나오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한 가지 펜을 다 써본 적이 없었다.

 

 

 

1 폐업을 앞둔 삼천포의 문방구에서 구입한 미코팬시 정리함. 2 책 전용 먼지떨이가 걸려 있다. 3 인도의 노트 상점에서 구입한 기도 일기장.

 

새 문구를 많이 들일 텐데 어떻게 정리하나?
(집을 둘러보며) 보다시피 정리는 안 한다(웃음). 물건이 많으므로 순환과 방출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때는 의미가 컸지만 이후 의미를 잃는 물건도 많지 않나. 계속 끌어안고 있으면 다음 물건이 들어올 여백이 없다. 작은 집에 수용할 수 있는 양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친구들과 플리마켓을 열거나 필기구를 모아 보육원 등에 기부한다. 앞에 몇 장 쓴 공책도 어린이들에게 늘 필요하다고 하더라. 직접 써보고 궁금증을 해소한 뒤 다른 누군가가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잘 보내는 것이 내 수집 생활의 핵심이다.

 

가장 최근에 들인 문구는 무엇인가?
아이플라이텍(iFLYTEK)의 AI 노트 에어 2를 며칠째 쓰고 있다. 이 브랜드는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중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AI 전문 기업이라고 한다. 음성을 인식해 실시간으로 필사하는 건 물론 번역을 동시에 해낸다. 내장된 펜슬로 필기도 가능하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이 노트의 기능에 대해 전파하고 있다. 또 전설의 만년필로 불리는 파이롯트 뮤 701을 일본 중고 거래 사이트 메루카리에서 구입했다. 닙이 분리되지 않는 인테그럴 닙 만년필인데, 1970년대 출시 후 단종되어 구하기 어려운 모델이다. 한창 네이버 카페 ‘문방삼우’를 들락날락하다 본 이후 오랫동안 갖고 싶었다. 주기적으로 중고 사이트를 검색한 끝에 마침 한 자루가 나왔기에 구입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 앞의 김규림 디렉터. 

 

최근 인도와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외에서 구입한 독특한 문구를 소개한다면?
배낭여행이라 물건을 많이 사지 못했지만 인도에서 기도 노트를 한 권 구입했다. 빨간 표지에 힌디어로 수를 놓았고, 책머리부터 책꼬리까지 핫핑크색이다. 한국에서는 쓰지 않는 배색인데, 과감한 시도가 재미있다. 이처럼 그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물건을 좋아한다. 중국 선전의 츠타야 서점에 갔을 때도 물론 눈이 시원하고 즐거웠지만, 브랜드 제품은 이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지 않나. 존재하는지 몰랐던 물건을 직접 발굴하고 이야기 들을 때 재미를 느낀다. 중국에서만 쓰는 일력, 태국의 장부 같은 물건을 많이 모았다. 

 

공책도 많이 갖고 있을 텐데, 동시에 몇 권을 사용하나?
지금은 네 권을 쓰고 있다. 호보니치 다이어리는 하루 한 장, 포인트오브뷰 다이어리는 하루 반 장씩 쓰는 일기다. 그날 일어난 일과 생각을 기록한다. 메인은 직접 제작한 노트로, 어디든 챙겨 다니면서 떠오르는 것을 쓰고 그린다. 가방에 넣어두는 조그마한 노트는 급할 때 사용한다. 노트가 작아야 채우는 맛이 있어서 일부러 작다 싶은 크기의 노트를 쓴다. 또 막힌 느낌을 싫어하기에 거의 무지 노트만 애용한다. 


소장품을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며 즐거웠다. 텍스트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문구 덕후’의 흥분이 느껴진다.
사실 방방 뜨는 내 모습이 싫었다. 평소에는 차분한데 물건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으니 카메라를 켜는 순간 말이 빨라지더라. 경쾌하고 발랄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도 부담스럽고. 하지만 어쨌건 생각을 글보다 빠르고 쉽게 전달할 방법이다. 어떤 분야든 인풋이 차오르면 자연스럽게 어딘가에서 흘러나와야 하지 않나. 그런 수단으로 문구도 제작하고 유튜브도 하는 셈이다. 

 

 

 

1 손목에 연필 그림 타투를 새겼다. 2 펜텔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린 양장 노트.

 

2020년까지 영상을 업로드하다 멈췄고, 작년에 시즌 2를 재개했다. 다시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1년에 한 번 내게 가장 의미 있는 물건을 꼽는데, 매해 리스트가 바뀌더라. 없으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 물건이 그다음 해에는 없어도 그만일 수 있다. 어느 날 2013년의 블로그 글을 다시 읽으며 그 물건들이 당시 나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깨달았다. 매년 바뀌더라도 궤적이 쌓이면 나를 이루는 결정적 요소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기록을 다짐했다. 또 무엇이든 내 것으로 남는 콘텐츠가 있길 바랐다.


21세기의 야나기 무네요시를 꿈꾼다는 글이 인상적이다. 제3세계 제작자들의 손기술로 이로운 제품을 만들고 싶다고 블로그에 썼는데, 이국의 수공예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나?
사람보다 물건에 더 관심이 많다고 나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영혼이 없는 물건을 왜 이렇게까지 좋아할까?’ 생각하던 때였다. 그러다 우연히 야나기 무네요시의 책을 읽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의 면모를 깨달았고, 발굴의 희열에 대해 쓴 대목을 읽으며 작가가 무척 부러웠다. 그가 전라도에서 도자기를 발견했을 때 현지 장인들은 공예품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그는 너무 벅찬 나머지 밤에 기록을 남겼다. 꼭 내 모습 같았다. 나 역시 해외에서 수작업으로 무언가 만드는 사람들을 보며 경이를 느꼈고, 동시에 세밀한 기획을 더하면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 즐거운 상상을 한다. 세상에 훌륭한 기술을 가진 메이커가 많으니, 그것을 활용해 그들에게 이익이 되고 내게도 가치 있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다. 최근 인도에서 블록 프린팅 제작자를 만났을 때도 수요가 늘어야 지속 가능하므로, 더 알릴 수 있는 기획을 해보고 싶었다.

 

 

 

1 문구 브랜드 미도리의 직원들이 선물한 롤링 페이퍼(오른쪽 맨 위), 그래픽 디자이너 애런 페이가 재해석한 컴포지션 노트(오른쪽 맨 아래). 2 트롤리의 맨 위 칸에는 자주 사용하는 문구류를 두었다.

 


그렇다면 청사진을 그리는 단계인가?
급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평생 새로운 것을 발견할 운명 같아서 길게 보려 한다. 그런데 최근 ‘인도로 간 빠리지엔’이라는 패브릭 브랜드를 접하고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시각을 배웠다. 그분이 패브릭으로 풀어내듯 문구류 등으로 그런 기획을 한다면 이전에 없었지만 새로이 존재함으로써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물건을 모으는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수집의 기쁨에 대해 듣고 싶다.
물건이 쌓이면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도 많더라. 예컨대 그들이 사람을 만나는 데서 기쁨을 누린다면, 수집가는 물건 자체를 소유한다는 사실을 넘어 이야기가 삶에 달라붙는 기쁨이 클 것이다. 수집가의 집에 가서 ‘이 물건은 뭐예요?’라고 물으면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온다. 그건 물건이 단순히 아름다워서 수집했다기보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콘텐츠에 매료되었기에 모은 것이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시간과 노력, 큰돈을 들여 구입하는 행위는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삶에 가져오고 싶다는 열망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이렇게까지 모아도 될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점을 고민해보길 바란다. 또한 수집이 내 삶의 축을 단단하게 만든다. 물건은 모으면 모을수록 방향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프에 많은 점을 찍어 연결해야 흐름이 눈에 보이듯, 수집을 통해 내가 진정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더네이버, 라이프스타일, 컬렉터

CREDIT

EDITOR : 박지형PHOTO : 손동주

아이매거진코리아닷컴, 더네이버, 동방유행 ©imagazinekorea.com, ©theneighbor.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