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야말로 ‘떠남’이 가장 절실한 때인지도 모른다. 일 년 내내 프로젝트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주했고, 업무와 인간관계가 차례로 롤러코스터를 타는사이 숨 가쁘게 열두 달을 달려왔다. 이제 스스로에게 위로와 호의를 베풀 시간이다. 여행은 여름이 제격이라는 정설은 희미해져버렸다. 겨울로 잠입할 수 있는 북구의 도시 혹은 겨울에도 따듯한 햇살이 떨어지는 이탈리아 남부나 스페인으로 떠나는 것도 좋겠다. 그곳의 호텔은 여행 중 휴식과 온기, 새해에 대한 기대를 덧댈 수 있는 유일한 은신처가 되어줄 것이다. 하염없이 눈길을 걸은 뒤, 노란 전구가 알알이 박힌 크리스마스 마켓을 둘러보고 돌아와 호텔 라운지의 벽난로에서 몸을 녹이는 밤은 로맨틱하다. 게다가 어떤 요구에도 환대로 응해줄 친절한 직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홀로여도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연말 은신처로 삼기 좋은 유럽의 다섯 호텔들을 소개한다.
2024.11.28
1 1910년에 지어진 에트헴의 고풍스러운 외관. 2 타일 벽난로의 온기가 전해지는 10호 스위트룸. 3 창밖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창가의 욕조.
겨울 여행의 묘미를 알아차린 건 작년 연말, 스톡홀름에서였다. 도시는 알록달록한 일루미네이션과 노랗고 빨간빛의 오너먼트들로 반짝였지만, 북구의 추위는 오후 3시가 되면 재빨리 어둠을 몰고 왔다. 서둘러 돌아와 긴긴 밤을 보낸 호텔 에트헴은 스웨덴어로 ‘집’이라는 이름처럼 포근하고 편안하다. 1910년도에 지어진 타운하우스를 개조한 객실 12개의 작은 호텔로, 규모와 분위기, 직원들의 환대 방식에서도 누군가의 집에 초대된 듯한 느낌을 준다. 커다란 욕조를 창가에 설치한 2층의 스위트룸은 창밖 눈 쌓인 동네 풍경을 동화적으로 끌어들인다. 타일로 만든 옛날 구조의 난로가 가지런한 장작과 함께 놓여 있다. 방이 싸늘해 리셉션에 전화를 걸어 불을 지펴달라고 요청했다. 잠시 후, 성냥과 불쏘시개용 신문지 몇 장을 들고 직원이 나타나 난로의 불을 피웠다. 그녀는 꽤 능숙하게 종이와 나무껍질에 불을 붙이고, 이어 장작을 두어 개 집어넣었다. 활활 타는 장작의 무게만큼 방은 금세 온기가 퍼져 나갔다. 허기가 몰려올 땐, 1층 레스토랑에서 선보이는 신선한 메뉴들을 택할 수 있다. 단호박과 함께 구운 대구 요리에 화이트 와인 한 잔, 그리고 연말 디저트 파네토네의 달콤함을 곁들인다면 완벽한 밤을 위한 준비는 끝난 셈이다.

1 170년 전 건물을 살린 호텔 입구. 2, 3 현대미술과 어우러진 팔라초 다니엘레의 객실. 4 아티스트 안드레아 살라가 디자인한 신비로운 샤워룸. 5 천상의 휴식을 맛볼 수 있는 야외 풀.
한겨울에도 영상 10℃를 웃도는 이탈리아 풀리아. 작은 마을 갈리아노 델 캄포의 팔라초 다니엘레에서 보내는 연말을 꿈꾼다. 맨발에 스웨터만 두르고도 옛 골목을 산책할 수 있는 12월은 떠올리기만 해도 설렌다. 170여 년 전 건물을 섬세하게 복원해 12개의 스위트룸을 품은 팔라초 다니엘레는 옛 프레스코 천장화와 아르누보 벽화 그리고 현대미술이 공존하는 예술의 또 다른 세계이기도 하다. 교회 종소리가 들려오는 정원의 돌기둥 옆에서 하우스 셰프 도나타가 만들어내는 느긋한 아침을 즐기고, 객실의 넓은 침대에 누워 겨울에도 선명하고 따듯한 남부 이탈리아의 햇살에 몸을 맡길 수 있다. 팔라초 다니엘레는 우아하게 살려낸 옛 흔적이 선명하다. 예배당의 제단은 칵테일 바가 되었고, 아치형의 샤워룸은 밀라노 아티스트 안드레아 살라가 디자인한 공간으로 마치 수도원 중정의 물줄기처럼 천장에서 쏟아진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종류의 아름다움은 새해 새날을 위한 고유한 영감이 되어줄 것이다.

1 판재로 지어진 호텔 카반의 오두막 스위트룸 외관. 2 집 거실 같은 분위기의 라운지에서는 마음에 드는 LP를 들을 수 있다. 3 카반 스위트룸의 정겨운 침대. 4 테라스에서 바라본 원시적인 파라다이스 카반 스위트룸.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파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예외는 아니다. 빛나는 에펠탑과 쇼윈도에서 곰인형들이 춤을 추는 파리를 놓칠 수 없다면 몽파르나스 근처의 호텔 카반에서 머무르는 것은 어떨까. 객실 43개를 품은 이 호텔은 단 하나의 특별한 스위트룸인 ‘오두막’을 제공한다. 건물 바깥 중정에 호젓하게 떨어진 방은 나무 패널로 툭툭 지어낸 듯한 오두막으로, 호텔 안에 있되 분리되어 비밀스러운 고립감을 느끼게 한다. 르코르뷔지에가 자신을 위해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나무 집을 지었듯, 오두막은 원시에 가까운 색 다른 유토피아다. 임스의 옐로 체어와 패브릭 다이아몬드 체어, 침대 옆에 달린 로프 그네가 자연적이고도 경쾌한 무드를 더한다. 슬라이딩 유리문을 활짝 열면 알싸한 공기와 함께 나 홀로 점유할 수 있는 테라스가 나타난다. 앙상한 겨울나무와 덩그러니 놓인 통나무 스툴 하나, 마치 초현실적인 연극무대 같았다. 호텔 밖은 캐럴과 연말의 소란으로 가득하지만 내 세계는 굳건히 이렇게 고요 속에 있다는 사실이 흡족해지는 순간이다.

1 아만 르 멜레징 레스토랑의 창밖 설원 풍경. 2 자작나무 향이 나는 아만 르 멜레징의 객실. 3 모닥불이 타고 있는 바 한편. 4 <007> 시리즈에 나올 법한 위용 있는 아만 르 멜레징 건물.
프랑스 남동부의 쿠르슈벨 1850은 알프스 해발 1850m에 위치한 대표적인 겨울 휴양지로 웅장한 설산을 만끽할 수 있다. 유럽의 로열 패밀리와 배우들이 유독 사랑한 곳으로, 다이애나 왕세자비, 젊은 시절 그레이스 켈리가 아이들과 즐겨 찾던 유서 깊은 리조트와 럭셔리 부티크 매장도 즐비하다. 아만 르 멜레징은 아만 리조트 중 유일하게 매년 겨울부터 이듬해 4월까지 운영하는 프로퍼티다. 작년 겨울, 난 글을 쓰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가 며칠을 보냈다. 모두가 스키를 즐기기 위해 모인 설국에서, 난 독보적인 겨울 세상을 관찰자의 눈으로 촘촘히 기록하고 이따금 모닥불 옆 테라스에 앉아 하염없이 설산을 바라보기도 했다. 컨시어지 직원은 다가와 왜 스키를 타러 가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난 나만의 이유를 간직하면 될 일이었다. 자작나무로 지어진 건물에서 타오르는 알싸한 장작 냄새, 녹색 벨벳 가구들, 저녁이면 다시 쏟아지는 함박눈을 곁에 두고 틈틈이 중년으로 접어든 내 삶을 돌아보고 정비했다. 겨울이 끝나면 사라져버릴 세계, 그래서 밤이면 혼자서 스파의 넓은 풀을 쉼없이 유영했다.

1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으로 채워진 스위트룸. 2 노비스 호텔 팔마의 드라마틱한 로비. 3 대리석 석관이 놓인 신비로운 스파. 4 무어 양식의 화려함이 남아 있는 중정의 수영장.
마요르카는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섬으로 들어간다는 행위의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노비스 호텔 팔마는 12세기 무어 양식의 궁전을 개조한 5성급 호텔로, 스톡홀름의 호텔 그룹 노비스가 새로운 도전을 감행해 스칸디나비아와 스페인의 전통 양식을 유니크하게 결합했다. 우뚝 솟은 돌기둥과 사원 같은 아치형 파티오 주변으로 울창한 양치식물들이 너울거린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리셉션의 패널 천장에 새겨진 고대 아랍어 비문을 바라보며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하룻밤을 기약한다. 객실의 높은 서까래와 흘러내리는 리넨 커튼 너머로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고딕 첨탑이 펼쳐질 때, 팔마에 도착했음이 실감난다. 루프톱 바에 올라가 겨울을 잊을 따스한 대기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능동적인 휴식을 시작한 셈이다. 진정한 쉼은 모든 걸 잊는 것, 그때 그곳에 머물러 있는 나 자신만을 감각하면 될 일이다.
더네이버, 라이프스타일, 호텔
EDITOR : 박지형PHOTO : 각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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