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이 입맛에 맞는 음악만 척척 대령하는 시대. 그래서 하나의 음반을 집중해 듣는 경험이 더욱 귀하다. ‘딥 리스닝’ 전시는 완결성 있는 음악에 몰입하는 순간의 전율을 다시금 일깨운다.
2024.11.18
첫 트랙을 감상하는 1층 전시실.

1 전시장 곳곳에서 아르보 패르트를 담은 다큐멘터리 <푸가를 위한 24개의 전주곡>이 재생된다. 2 빈백에 앉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2층 전시 공간. 3 ECM 음반의 다채로운 아트워크를 함께 전시했다.

1 마지막 트랙을 위한 뱅앤올룹슨 베오랩 90. 2 <타불라 라사> 악보와 카세트테이프. 3 <알리나(Alina)>를 카세트테이프로 재생하는 소니 CF-580.
“작곡가에게 침묵은 화가에게 깨끗한 캔버스나 시인에게 깨끗한 백지와도 같습니다.” 에스토니아의 현대음악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말이다. 침묵을 ‘빈 서판’, 즉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고 표현한 그는 침묵을 이해하는 작곡가다. 긴 설명보다 그의 음악을 듣는다면 잔향 뒤 찾아오는 침묵의 힘을 느낄 수 있으리라. 독일 음반사 ECM이 발매한 아르보 패르트의 <타불라 라사>를 경험하는 전시가 리빙룸 마이알레 이태원에서 열렸다. <아르보 패르트: 타불라 라사>는 전시 제작사 유니크피스가 기획한 ‘딥 리스닝’ 시리즈의 첫 번째 프로젝트다. 앨범 전체를 온전히 집중해 감상하는 데 초점을 맞췄으나 청음회처럼 한자리에 앉아 청취하는 형식이 아니다. 가정집이었던 공간을 걸어 다니며 음악을 자연스레 접하는 경험을 설계했다.
‘딥 리스닝’은 음악 애호가만이 할 수 있는 기획이다. 김현석 대표는 녹음 엔지니어 출신의 사운드 전문가이고, 김주희 대표도 꾸준히 CD와 LP를 수집해온 리스너다. 이들은 지난 5월 독일 프라이부르크 ECM 페스티벌 현장에서 <타불라 라사>의 40주년 기념 LP 발매 소식을 접했다. 음악 전시 아이디어를 탐색해온 차에 이 음반이 출발점이 된 것이다. 여기에 마이알레가 공간 큐레이션을 맡아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완성했다. 본래 2층 주택이었던 리빙룸 마이알레는 기존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가구와 벽에는 흰 타이벡 천이 덮였고, 곳곳에 음향기기가 자리한다. 눈 내린 겨울 공원 같기도, 텅 빈 수도원 같기도 한 내부는 고요를 시각화한 듯하다.
관람객은 안내에 따라 발길을 옮기며 순서대로 곡을 감상한다. 정원은 최대 15명. 최적의 경험을 고려한 숫자다. 먼저 1층 안쪽에서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메르와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이 연주한 첫 트랙 ‘프라트레스(Fratres)’가 시작된다. 이어 1층 중앙에서는 ‘칸투스(Cantus)’, 2층 침실에서는 12대 첼로 버전의 ‘프라트레스’, 그리고 2층 가운데 홀에서는 하이라이트인 ‘타불라 라사’가 흘러나온다. 빈백에 자유롭게 앉거나 누워 감상할 수 있다.
송출하는 오디오도 중요할 터. 이 음반은 그간 LP와 카세트, CD, 디지털 음원으로 발매되었기에 각 음원에 맞는 장비를 배치했다. 덕분에 턴테이블과 진공 앰프, 카세트 플레이어부터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다양한 음색을 접할 수 있다. 음반을 모두 감상했다면 영상을 둘러볼 차례다. 아르보 패르트가 출연한 다큐멘터리 클립이 곳곳에서 재생되고 있다. 벽에 걸린 ECM 앨범 커버 아트도 반가움을 자아낸다. 다큐멘터리에서 패르트는 말한다. 작곡가는 모든 소리를 사랑해야 한다고. 청자인 우리는 소리와 침묵을 모두 끌어안은 그의 음악을 통해 사랑의 방식을 배운다.

음악을 테마로 한 ‘딥 리스닝’ 전시는 어떻게 기획했나?
김주희 어느 날 대화 중 하와이를 주제로 전시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러다 그 대척점에 있는 섬인 아이슬란드를 떠올렸다. 아이슬란드 7개 도시에서 음악을 만든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반 <아이슬란드 송(Island Songs)>을 전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김현석 다만 처음부터 방대한 영역을 다루는 건 피하고자 했다. 한 장의 음반, 하나의 공연 등 구체성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
전시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는지?
김현석 음악 감상이 점차 개인적인 행위로 변화했고, 좋아하는 장르에 편향되는 경향이 심해졌다. 평소와 다른 경험을 통해 이전에 음악을 향유하던 방식을 되돌아보려는 시도다.
김주희 요즘은 누구나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간편하게 음악을 듣는다. 알고리즘이 음악을 추천하고, 그마저도 몇 초만 듣고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나. 개인적으로 아직도 이어폰이 낯설다. 여전히 CD나 LP로 음악을 듣는데, 한 음반 전체를 감상하는 건 전혀 다른 경험임을 공유하고 싶었다.
김현석 하지만 이 전시가 특별히 새로운 형식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돌아다니며 음악을 듣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 보통 전시장에서는 큰 사운드와 서라운드 시스템이 관객을 압도하며 몰입을 강요한다. 그와 달리 우리는 자유로운 몰입을 유도했다.
공간마다 다른 음향 장비를 비치한 이유는?
김주희 극장처럼 가만히 앉아 집중하는 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 극장형 시스템을 배제했다. 이 음반은 40년 전 발매되어 LP, 카세트, CD부터 디지털 음원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를 모두 소개하고 싶어 여러 음향 장치를 매칭했다.
김현석 한 시스템으로 50분을 쭉 듣는 건 힘들다. 그래서 레트로와 모던, 가정용부터 전문가용 기기까지 다양한 매체로 구성했다. 동시에 오디오에 과하게 힘을 싣는 건 피했다. 다만 마지막 악장에는 뱅앤올룹슨 ‘베오랩 90’을 배치했는데, 실황 연주곡이라 임장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넓은 음역대를 충분히 커버하면서 시각적으로 대비되는 디자인의 모델을 선택했다.
앞으로의 전시 계획이 궁금하다.
김주희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 우선 오는 12월 서촌에서 두 번째 ‘딥 리스닝’ 전시를 열 예정이니 기대해달라.
더네이버, 라이프스타일, 전시
EDITOR : 박지형PHOTO : 강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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