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겹겹의 막을 지나 당도한 유현미의 세계

다양한 매체의 방법론을 도입해 초현실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아티스트 유현미. 그가 2024년 재해석한 신(新) 십장생도는 전통이 현대와 호흡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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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 작품의 경계에 자리 잡은 유현미 작가.

 

아티스트 유현미는 흔히 매체의 경계를 흐리고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로 소개된다. 회화, 조각, 사진, 그리고 영상과 소설까지 끌어들여 작품 세계를 확장해온 행보는 관심사가 드넓은 팔방미인을 연상시키지만, 그는 분야를 오가는 탐험가라기보다 매체를 도구로 활용해 깊은 우물을 파는 장인에 가깝다. 각각의 방법론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작가의 세계관으로 수렴된다. 예컨대 사진의 외피를 쓴 작품 속에는 회화, 설치, 조각 과정이 존재하고, 소설과 영상은 이미지로 이어진다. 몇 겹의 레이어를 들추며 파고들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작품 속에 깊이 들어선 채다. 


10월 6일까지 뮤지엄한미 삼청별관에서는 유현미 작가의 개인전 <Good Luck: 십장생>이 개최된다. 전통적으로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을 재해석한 신작을 선보이는 전시다. 사진 미술관이지만 전시작은 매끈하고 선명한 평면 프린트가 아니다. 유화와 잉크젯 프린트가 혼재된 작품 정보에서 보듯, 캔버스에 사진을 인쇄하고 그 위에 유화 물감을 덮어 한 겹을 더 쌓은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사진일까, 유화일까? 형식 실험이 작가의 역할이라면 답은 관객의 몫이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실 한편에 무대를 만들어 작품에 등장하는 조각을 설치했다. 평면 작품을 감상한 뒤 설치 작품에 다다라 오브제의 양감을 느낀다면 자연스레 이미지의 형식에 대한 질문이 피어오른다.


창밖으로 잎이 무성한 나무와 옛 가옥의 지붕이 내다보이는 뮤지엄한미에서 작가를 만났다. 설치 작품의 경계에 자리 잡은 그는 막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건너온 여행자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Good Luck: 십장생> 전시장 2층 전경. 김희선 촬영, 뮤지엄한미 제공.


2011년 갤러리 인의 개인전 <Good Luck>에서 ‘십장생’ 연작을 선보인 이후 이 시리즈를 새롭게 전시한다.
한국 전통 미술에는 구복 신앙이 담겨 있다. 달마도나 십장생도, 책가도와 같은 전통 회화는 집안에 복을 들이고 안위와 평화를 바라는 의미로 걸어두곤 했다. 2011년 전시를 준비하며 이 같은 전통 미술의 특징을 연구했고, ‘Good Luck’이라는 테마로 작업했다. ‘십장생’으로 다시 전시를 하는 건 인연일지 모르겠다. 당시 갤러리 인에서의 개인전 후 한미사진미술관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마침 올해 환갑인데 뮤지엄한미에서 이 전시를 여는 것이 인연처럼 느껴진다. 또 나이가 들수록 한국 미술에 대해 좀 더 연구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전 작업 후 ‘더 재미있게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도 했고.


그렇다면 그때보다 더 재미있는 방법을 찾았나?
이전에는 전통적인 부분에 더 집중했다면, 신작은 재해석하여 모던한 느낌을 내려고 노력했다. 같은 오방색이라도 현시대 사람들이 더 공감할 수 있는 컬러가 있지 않나. 립스틱 색깔만 해도 유행이 있듯, 현재 공감하는 오방색은 무엇일지 고민했다. 언어도 관점도 계속해서 변한다. 그런데 전통은 끊어지고 변화하는 게 아니라 결국 흐르는 것이므로 그런 측면을 반영하려 했다. 형태는 더 기호화했다. 이를테면 원뿔은 사슴을 의미하고 노란 구는 달, 빨간 구는 해에 해당한다. 학은 종이학으로 표현했고, 물은 파란색으로만 나타냈다.

 

 

<핑크 에피소드 No.1>, 2024, Oil paint and inkjet print on canvas, 194×130cm. © 유현미


공간감이 드러났던 이전 시리즈와 달리 신작은 오브제에 더 집중한 느낌이다.
실제로 공간이 좁아졌다. 예전에는 방 하나를 전부 사용했는데, 옛 책가도를 보면 흰 배경에 물건이 떠 있는 듯이 쭉 쌓여 있다. 그것을 재현하고자 연구하다 보니 스케일이 작아졌다.


선명하고 생생한 컬러가 눈에 띄는데, 색은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나?
오브제를 칠할 때 대부분 인테리어 페인트를 사용했다. 벽 색깔로 많이 사용하는 무광 인테리어 페인트다. 현재 우리가 많이 보는 색이므로 관객이 자신도 모르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시대의 대중이 공감할 법한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일까?
그런 생각은 늘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어쩌면 대중과 괴리가 발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대체로 새로운 것을 원한다. 그런데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이 새롭게 보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새롭게 보일 수 있을까.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외국 소설만 해도 30년마다 다시 번역해야 한다. 그만큼 언어가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내 경우 소설을 쓰면 20대 아르바이트생에게 읽게 한 뒤 모르는 단어, 모르는 감성을 알려달라고 한다. 옛날에 쓰던 단어를 신세대가 모른다고 해서 무지하다고 여기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언어가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굳이 알 필요가 없지 않나. 

 

 

 

다매체 작업의 출발점은 대학원이라고 들었다.
한국 학부 시절에는 순수미술을 하지 않으려고 동시에 디자인 학교를 다녔다. 당시 디자인 학교가 압구정에 있었는데,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매일 압구정으로 가니 친구들은 날마다 놀러 가는 줄 알더라(웃음). 이후 디자이너로 취직을 했는데 6개월 만에 그만뒀다. 단체 생활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미술로 돌아온 것인가?
사실 시어머님(시인 김남조)이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대학원은 무조건 가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셨다. 그러던 중 남편(개념미술가 김범)이 대학원 유학을 가게 되면서 함께 준비했다. 한국 대학원도 시험을 봤는데, 학부 때 전공 대신 다른 과 수업을 듣고 디자인 학교 다니느라 거의 작업실에 없던 학생이라 받아주지 않더라(웃음).


오히려 NYU 대학원 수업 방식이 잘 맞았겠다.
미국은 스튜디오 아트 방식이라 사진, 세라믹, 페인팅 등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다. 각 과 사람들이 모두 나를 자기 과 학생인 줄 알았을 정도다.

 

2009년 ‘Still Life’ 시리즈부터 사진 작업 방식이 자리 잡았다고. 사진이라는 레이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미술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또는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연구하는 분야다. 사람들이 왜 어떤 이미지를 좋아하고 어떤 이미지는 싫어하는지, 어떤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계속 연구하며 이미지를 다룬다. 답은 없지만 꾸준히 탐구하고 모색해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좋은 그림을 보면 ‘사진 같다’고 하고, 좋은 사진을 두고 ‘그림 같다’고 한다. 두 장르가 서로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각 장르의 장점을 하나로 모으면 굉장히 좋은 이미지가 탄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해 시간을 완전히 저장하는 리얼리티가 존재한다. 그런 한편 회화는 물성이 있고 표현하는 사람에 따라 접근법이 상이하다. 조각은 공간에 대한 작업이고. 삼각대처럼 ‘세 영역을 치우침 없이 모두 보이면 어떨까?’라는 물음에서 이것저것 시도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No.1>, 2024, Oil paint and inkjet print on canvas, 194×130cm. © 유현미

 

각 분야의 스태프와 협업해야겠다.
사진, 조각, 컴퓨터 등 여러 분야 전공자들과 함께 일한다. 다만 컴퓨터를 많이 활용하지는 않는다. 포토샵은 거의 안 쓰고 작품 속 오브제도 실제로 아슬아슬하게 쌓아서 촬영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무게중심을 맞춰 세운 뒤 ‘다들 숨 쉬지 마!’ 하며 찍은 것이다(웃음). 이전부터 이런 작업을 해왔는데 초현실주의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물체가 공중에 떠 있기 때문이다. 왜 보편적인 사물이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 떠 있으면 초현실적으로 보일까?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자세한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예전에는 석고로 조각을 만들었고 지금은 오브제를 많이 활용한다. 오브제 위에 색을 칠한 뒤 무대에 설치하는데, 사방에서 조명을 비춰 그림자를 없애고 회화 작업으로 그림자를 다시 만들었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지나치게 회화적이다 보니 조각성이나 사진성과 균형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연스러운 그림자를 만들어 사진을 찍었다. 그것을 캔버스에 프린트한 뒤 유화 물감으로 얇게 색을 올렸고. 캔버스에 프린트한 결과물은 동일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나일론과 실크가 사진에서는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다르듯 사람은 눈으로도 이미지를 만진다. 그래서 작년부터 프린트 위에 유화 물감으로 같은 색을 칠해 물성이 느껴지도록 작업했다. 유화는 투명성이 있어 물감 아래 색을 투과하여 볼 수 있다. 

 

 

전시장 3층 전경. 김희선 촬영, 뮤지엄한미 제공.


소설 작업은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했다고. 이전부터 글로 표현하고 싶은 의지가 있었나?
사실 소설을 쓸 줄은 몰랐다. 성격이 급해서 무언가 하고 싶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영화를 하고 싶었다고 하기에 그냥 해보라고 했더니 예산이나 여러 제약에 대해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내가 영화를 만들어버렸다. 시나리오를 쓸 줄 모르니 시나리오 작법서를 찾아 읽었고, 집 2층을 세트로 만든 뒤 여기저기 학생들을 모아 찍었다. 그게 20분 길이의 단편영화 <그림이 된 남자>다. 이 영화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 작업 과정을 아무리 설명해도 잘 모르기에 영화에 담았다. 또 하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결국 그림이 되는데, 일반 대중이 미술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미술에 관심은 있지만 친해지고 싶지 않은 복잡미묘한 마음을 시나리오에 담았다. 글의 인연을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긴 했다. 어린 시절 집의 한쪽 벽이 책장이었는데 전집으로 가득했다. 중학생 때 ‘저걸 다 읽어야지’ 하는 허세가 있었다(웃음). 그렇게 읽다 보니 저절로 짧은 글도 조금씩 쓰게 됐다. 임신했을 때 배가 점점 불러오면 얼른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처럼 글이 쌓이다 보니 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끝나는 것 같기도 해서 빨리 내보내고 싶어졌다. 


시각 작업과 소설 창작의 경험이 다를 것 같다. 
글은 더 몰입되고 쓰는 동안 단순한 재미가 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혼자 하는 작업이니 나이 들수록 더 좋을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잠이 안 오면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다 잠드는 습관이 있었다. 한 번 사는 인생이니 해보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강아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한 집에서 두 마리를 키우는데 그중 하나가 놀랄 만큼 똑똑하다. 한 영상에서는 사람이 문을 투명 랩으로 막은 뒤 반대편에 음식을 두었다. 그럼 천재 개는 장애물 앞에서 멈춘다. 그런데 조금 바보 같은 개는 돌진해서 랩을 뚫고 음식을 먹더라. 그 장면에 감동했다. 두려움이 보이지 않아야 돌진할 수 있다. 또 하세가와 에이스케의 책 <일하지 않는 개미>를 재미있게 읽었다. 일하지 않는 벌에 대한 대목이 있는데, 이들은 무리를 따라가지 않고 떠돌다 집으로 돌아가 꿀을 축낸다. 그런데 연구 결과 놀고먹는 벌이 있는 무리가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들이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돌아다니다 꿀이 있는 새 장소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벌들이 곧 아티스트라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무리에 속하지 못하지만 이들 중 누군가가 새로운 문을 열 수 있다. 

 

 

<달 밝은 밤>, 2024, Oil paint and inkjet print on canvas, 162×112cm. © 유현미


지금 소설로 품고 있는 이야기가 있나?
고흐에 관한 소설을 한 편 완성했다. 하지만 소설과 연결되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 아직 출간을 못하고 있다. 


최근의 관심사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작품이 지나치게 교육적으로 비칠까 봐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전시작에 깔아둔 상징이 있다. ‘십장생’에는 오래 살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지만 최근 기후 변화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 않나. 특히 홍수나 가뭄 등 물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 배경으로 물을 표현했다. 콘셉트 아트로 가는 것도 좋은 방향이지만, 자연스럽게 즐겁게 소비하면서 깨닫고 변화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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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박지형PHOTO : 임한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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