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부임과 이임은 패션계의 빅 뉴스다. 영향력이 막대한 디자이너는 그 이름이 곧 브랜드의 정체성이기 때문. 그런데 최근 들어 스타 디렉터를 앞세우기보다 낯선 이름의 디렉터가 임명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다니엘 리가 만든 ‘뉴 보테가’ 신드롬처럼 새로 부임한 신예 디렉터에 의한 리브랜딩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디렉터의 세대교체가 더 빈번해지는 추세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건, 헬무트 랭의 새로운 수장 피터 도. 그의 임명 소식은 최근 사그라든 뉴욕 패션위크의 열기를 다시 뜨겁게 달궜다. 피비 파일로가 셀린느의 수장이던 시절 그녀의 오른팔이었던 그는 ‘차세대 피비 파일로’라 불릴 정도로 주목받았다. 그는 ‘Born to Go’라는 주제의 첫 번째 데뷔 컬렉션을 통해 헬무트 랭의 상징적인 아메리칸 캐주얼을 표현했다. 거기에 피터 도는 자신의 강점인 섬세한 테일러링을 더해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에 자신의 색을 입혔다. 새로움을 찾을 수 없었던 전임자들의 컬렉션으로 내리막길을 걷던 헬무트 랭에 피터 도가 구원자가 될 수 있을지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이어진 밀라노 패션위크의 최대 화제는 사바토 데 사르노의 구찌 데뷔쇼였다. 그는 프라다와 돌체앤가바나를 거쳐 지난 13년간 발렌티노에서 패션 디렉터로 일해온 숨은 실력자였다. 이탈리아어로 ‘다시’라는 뜻을 지닌 그의 첫 컬렉션 ‘Ancora’는 톰 포드가 이끈 1990년대 구찌를 연상시킨 피스들과, 과거 히트한 백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구찌를 통해 패션에 빠진 자신처럼, 사람들이 ‘다시’ 구찌와 사랑에 빠지길 기대하면서. 피터 호킨스의 톰 포드 데뷔쇼도 밀라노에서 뜨거운 이슈였다. 지난해 말 에스티 로더 그룹에 브랜드를 매각하고 떠난 톰 포드의 바통을 이어받은 피터 호킨스는 무려 25년간 톰 포드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브랜드의 남성복 카테고리를 담당하며 무한 신뢰를 받아왔기에, 단번에 디렉터로 임명될 수 있었던 피터의 첫 컬렉션은 1960~70년대 슈퍼모델 도니알 루나에게 영감 받았다. 그녀가 지닌 신비로움과 1970년대 특유의 섹시함을 의인화하듯 표현한 컬렉션을 통해 자신만의 강점을 탄탄하게 드러냈다.
발리의 시몬 벨로티와 앤 드뮐미스터의 스테파노 갈리치도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사바토, 피터 호킨스와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묵묵히 일하면서 실력을 키우고 인정받은 루키 디렉터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다음 시즌이 더 궁금해진다.

새로운 디렉터의 등장이라는 반가운 뉴스 이면에는 오래 함께한 브랜드와 작별을 고한 디자이너들의 소식이 있다. 같은 하우스에서 26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 알렉산더 맥퀸의 디렉터 사라 버튼의 고별은 큰 아쉬움을 안겼다. 사라 버튼은 맥퀸의 타계 후 14년 동안 브랜드의 수장으로, 맥퀸의 유산에 파워풀한 테일러링과 페미닌함을 더해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온 인물이다. 마지막 컬렉션의 주제는 ‘Anatomy ll’.
지난 2023 F/W 컬렉션에 이어 해부학에서 영감 받았다.
아카이브를 훑어 그동안 선보인 상징적인 디자인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한 피스도 다수 보였다. 런웨이 마지막에 인사하러 나온 사라에게 모두가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은 패션 신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사라 버튼과 마찬가지로 충격적인 사임 소식을 전한 건 블루마린의 니콜라 브로냐노였다.
단 6번의 컬렉션만으로 블루마린을 주목받는 브랜드로 성장시켜놓은 터라 그와의 작별이 더욱 의아했다. Y2K 패션이 메가 트렌드로 부상하는 데 앞장섰던 그는 마지막 컬렉션 역시 자신의 정체성이 묻어나는 관능적이고 젊은 디자인으로 풀어냈다. 밝음과 가벼움에서 영감 받아 골드와 pvc 등 빛을 내는 소재를 사용하고, 나비와 천사 날개로 위트를 더했다.
끌로에 또한 3년 동안 브랜드를 이끌어온 가브리엘라 허스트와의 이별을 알렸다. 본인의 브랜드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이유를 전한 그녀는 기업윤리와 환경문제를 꾸준히 조명하며 럭셔리 하우스 최초로 B Corp(사회성과 공익성이 검증된 기업) 인증을 받기도 했다. 꽃과 자연에서 영감 받은 마지막 컬렉션의 피날레에선 가브리엘라와 모델들 모두 춤을 추며 축제와 같은 현장을 연출, 그녀의 끌로에 여정에 박수를 보냈다.
2019년부터 토즈의 디렉터를 맡아온 발테르 키아포니가 블루마린 니콜라 브로냐노의 후임으로 부임했고, 드리스 반 노튼과 JW 앤더슨에서 경력을 쌓은 숀 맥기르가 사라 버튼의 뒤를 이어 알렉산더 맥퀸을 이끌게 됐다. 가브리엘라 허스트가 떠난 끌로에는 생로랑의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의 오른팔이었던 체메나 카말리를 새로운 디렉터로 임명했다. 수많은 변화가 있었던 2024 S/S 컬렉션.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는 디자이너들이 열어갈 새로운 시대에 기대와 응원을 전한다.
더네이버, 패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DITOR : 윤대연PHOTO : Launchmetrics/spotlight,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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